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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Mar 17.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05화

목적-2

{ 벗, 미치광이 - 제2권 04화 }에서 이어집니다.


  「자네들은 이미 나와 공범이야.」

조수석에 앉은 노인이 담담하게 답하자 태호는 조금의 틈도 없이 노인에게 되묻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목격자인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자네 말인즉⋯⋯. 방금 사람을 죽이고 그 현장을 사고로 꾸민 내가, 도움을 받고 나서는 자네들을 죽일 수도 있다- 뭐, 그런 말인 게지? 후환을 없애려고? 토사구팽을 한다? 내가?

 「그렇습니다. 아직도 어르신은 대답을 않고 계시니 더 궁금해지네요.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잖아요?

 「섭섭하구먼. 자네를 죽일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게. 아니, 이 사람아. 자네들을 죽이면, 그러니까 사람을 또 죽이면 그 정리를 하고서 나는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어. 이런 식으로 무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럴 체력이나 있으면 또 모를까. 자네, 허리 디스크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알기나 하나? 아무튼, 그럴 일 없으니 운전이나 잘하게. 도대체 어디로 가는 길인지나 말해봐.

 「호텔로 갑니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태호와 늙은 사장의 대화를 귀에 들어오는 대로 대충 듣는다. 어떤 말은 뇌리에 선명히 남고, 어떤 말은 듣자마자 지워져 버리고, 또 어떤 말은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은 죄다 우습기 그지없다. 자신을 죽일지 묻는 태호의 말투는 유쾌하고, 죽이지 않겠다 답하는 사장의 어투는 되려 읍소에 가깝다. 조용히 실소를 하던 중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이 자동차에 탄 네 사람 가운데 정신이 멀쩡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반대로, 아주 미쳐버린 사람은 몇일까? 적어도 나는 온전히 정상은 아닐지언정 그렇다고 완전히 미쳐버리지는 않았다. 사장은 사람을 죽이고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기만 하니까 미쳤다고 여길 만도 하지만, 조금 전의 살인은 나를 구해내기 위한 수단이 과격했을 따름이므로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연홍이의 경우 살인을 불사하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지만 그 대상은 근친강간범이다. 연홍이 자신과 제 딸의 아비이자 동시에 엄마의 오빠인 마약상이 복수의 대상이라면 누구라도 납득할만한 일이므로 연홍이 역시 완전히 미쳤다고 할 수는 없다. 태호는 어떨까. 죽을 고비가 많았던 것은 그저 우연이라 치부하더라도 그는 자살을 기도했었다. 게다가 까만 앞니를 절벽 아래로 내던져 죽이려 했고, 자신과 무관한 연홍의 아비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지금도 사장이 사람을 죽인 일을 망설임 없이 나서서 도와주고 있다. 여기 네 사람 중에서 진정 미치광이가 있다면 단연코 불사조일 것이다.


그나저나, 연홍이네 집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호텔로 가는구나-하고, 이유가 있겠지-하고 나는 생각한다. 마침 노인이 대꾸를 않자 태호가 말을 잇는다.

 「연홍이가 호텔에서 묵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리로 가는 겁니다. 가서, 유지 학생 목욕도 키고 옷도 갈아입혀야지요. 길이 꽤 막히네요.」

노인은 대답 대신 신음하듯 하품 소리를 낸다. 그의 심신은 꽤나 지쳐있는 것이 분명하고, 긴장이 풀리면서 음도 쏟아질 것이다. 내 왼쪽에서는 이미 잠든 연홍이의 새근새근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낡은 세단은 이따금씩 스프링의 삐걱이는 쇳소리와 트렁크에 실린 물건들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내며 가다 서기를 반복하지만 연홍의 나직한 숨소리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어느덧 사장도 조용한 걸 보니 잠에 들었거나 편안히 쉬기를 택했나 보다. 나는 머리를 창문에 기댄 채 두 눈을 감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잠들어 있지는 않다. 잠깐씩 졸기는 하지만 편하게 잠이 들 수가 없다. 정체가 심한 도로에서 태호가 차를 멈출 때에는 내 머리가 앞으로 숙여지고, 다시 차가 출발할 때에는 뒤로 고개가 넘어간다. 나는 눈을 뜨고 천천히 자세를 고쳐 바로 앉는다. 다들 침묵하고 있는 중에 혼자서 운전하는 불사조가 딱해서가 아니라, 편안하게 쉴 수가 없으니까. 피로는 여전하지만 기왕에 눈을 뜬 김에 말을 걸어보기로 한다.

 「아저씨, 저 일어났어요.」

 「지쳤을 텐데 조금 더 쉬지 그래?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로 험한 일까지 겪었으니까.」

역시 배려심 많은 태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휴식보다 그와의 대화가 더 좋다.

 「호텔은 얼마나 남았어요?」

 「모르겠어. 무슨 사고라도 난 건지, 내비게이션의 도착예정시각이 계속 늘어나는 중이야. 뭐, 그래도 한 삼십 분 정도만 더 가면 될 것 같아.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네.」

 「자다 깨다⋯⋯. 뭐, 그러던 중이었어요.」

 「그랬구나.」


그랬구나-라니, 이러면 대화가 끊어지고 만다.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되는 순간이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지만 그 이유는 확실치가 않다. 어색함을 떨치려고, 혹은 불사조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혹은 그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서⋯⋯. 이들 중 하나이거나, 전부일테지만 이 외에 다른 이유는 확실히 없다. 태호는 왼쪽 팔꿈치를 문에 대고 손으로는 동그랗게 주먹을 쥔 채로 머리를 떠받치고 귀찮은 듯 꽉 막힌 도로에서 꿋꿋하게 운전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풀고 다시 말을 꺼낸다.

 「저기⋯⋯. 아저씨, 생각해 봤는데요. 여기 우리 넷 중에서 아저씨가 제일 미친 사람 같아요.」

태호는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룸미러를 통해 나를 쏘아본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말을 잇는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을 즈음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니, 역시나 그는 정면을 향해 앉아 느릿느릿 움직이는 다른 차의 뒤를 따라 운전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별생각 없이 몇 마디의 말을 더 던져보기로 한다.

 「아저씨,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아요?」

그는 내 말에 숨을 천천히 코로 들이마시고, 입을 둥글게 말아 후-하며 한숨을 내뱉고서는 말한다.

 「딱히 궁금하지는 않다만, 말하고 싶은 눈치니까 말리지는 않을게.」

 「아니에요, 괜히 아저씨 운전하는데 방해만 될 것 같아요.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굳이⋯⋯. 아니에요.


 그는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내쉬고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문다. 그렇게 조용히, 오직 바깥의 경적소리와 낡은 세단의 삐걱이는 소리만 남긴 채 넷은 말 한마디 없이 조금씩 호텔을 향해 가까워진다. 내비게이션을 펴보니 호텔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이십팔 분이다. 나는 그가 운전에 집중하는 동안 창문 밖 도시의 밤거리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도로가 혼잡한 탓에 빛나는 길가의 간판들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관찰하디가 수월하다. 길눈이 밝지 않은 나도 이 길이 강남을 향하고 있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목적지가 강남이 아니고서야 굳이 혼잡한 이 길을 거칠 이유도 없을 테다. 아마도 연홍이가 묵고 있다는 호텔이 강남에 있나 보다. 나는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내 왼쪽에 앉아 아기처럼 잠든 연홍을 바라본다. 꾸미지 않아도 매력적인 얼굴과 새하얀 피부에 군살이라고는 없는 그녀는 이제 보니 속눈썹도 길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엄마라고 하기에 그녀 스스로가 너무나도 앳된 모습이고, 병으로 인해 살 날이 많지 않다는 말은 애초부터 거짓말인 것처럼, 그녀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과 그 괴리가 너무나도 크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다가, 역시나 나도 모르는 사이 한숨을 내쉰다. 그때, 태호가 말을 건다.

 「왜 하필이면 내가 제일 미친것 같다는 건지 말해줄래?」

 「우리 넷 중에 아저씨가 특별히 나머지 셋이랑 다른 점은 모르겠어요. 그냥 느낌이에요. 저랑 연홍이, 그리고 사장님은 뭐랄까⋯⋯. 정상하고 비정상의 어느 중간쯤인 것 같아요. 아저씨의 정상적인 면을 내가 몰라서 하는 생각이겠죠 뭐. 마음 쓰지 마세요. 잠깐만요, 아저씨. 설마 여태 그 이유가 궁금했던 거예요? 아까 진작에 물어보지 그랬어요⋯⋯. 미안해요.」

나는 사과의 전문가다. 타고난 것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노력형 실력파라고도 할 수 있다. 사과를 할 때에는 단어의 선택과 목소리의 크기, 어투와 표정까지 신경 쓸 부분이 많다. 그런데 불사조는 방금 나의 사과를 듣자마자 귀찮기라도 한 듯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한다. 생각보다 꽁한 구석이 있는 남자다.

 「유지 학생. 나머지 셋은 정상이랑 비정상 그 중간 어디라고 했지? 그런데, 그런 건 모순이라고 봐. 상품을 판매할 때에는 정상인 것만 공급해야 해. 양품이라고 부르지. 양품이 아닌걸 우리는 불량품이라고 부르는 거야. 조금 불량품 이런 건 없어. 사람이라고 뭐가 달라? 조금 미친 사람이랑 완전히 미친 사람? 결국 두 경우 모두가 정상은 아니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친 건 미친 거지. 그런 관점에서 내가 제일 미친 것 같다고 하니 황당하다고. 다음에 제대로 해명해주지 않으면, 미친 사람의 방식으로 혼내줄 거야. 나는 기회 줬다, 알았지?」


나는 불사조의 말에 건성으로 네-하고 대답한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하는 따위가 아니다.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의 말투다. 언제부터였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그가 내게 말을 놓았던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다음으로는 이유가 신경 쓰인다. 왜 내게 말을 놓을까? 그래, 이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이라도 편의점에서 말을 짧게 하는 손님은 호감이 가지 않는 법이다. 내가 편의점 직원이고 그가 손님이었을 때, 그는 분명 존댓말을 했다. 호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내게 반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반말을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모르겠는 것은 내가 기분이 좋은 이유이다. 단순히 그가 내게 말을 편하게 한다는 것 만으로 기분씩이나 좋아할 일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나뿐만이 아니라 연홍이에게도 말을 편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연홍이를 연홍아-라고 하듯이, 그에게 나를 불러 보라고 시키면 한 번쯤은 유지야-라고 해줄까? 아니면 조금 전처럼 그는 나를 영원히 유지 학생이라고 부를까?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대뜸, '아저씨, 저 한 번 불러봐 봐요.'라고 말을 꺼내면 분명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꺼내야 할 말은 무엇일까? 나는 일단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던져보기로 한다.


 「저, 그런데⋯⋯. 오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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