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육아일기
곱상한 외모에 조금 어눌하지만 조분조분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하는 남자의 얼굴엔 칼자국이 나 있었다. 팔 뿐만이 아니었다. 양쪽 팔에도 열 군데가 넘는 칼자국이 있었다.
그는 수의사였다. 뒷골목 생활을 청산하고 수의사가 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냥 수의사였다. 칼자국이 아니라 짐승의 발톱 자국이었다.
나는 체중 25kg짜리 풍산개를 키운다. 풍산개 하면 대단히 귀한 품종처럼 들리지만 외형상 시골 마당에 흔히 묶여 있는 백구다. 얘네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붙임성 없고 낯을 가린다. 주인 빼고는 사실상 모두 적이란 얘기다. 우리 개도 그렇다. 아니 얘는 좀 더 심해서. 가끔 주인도 몰라본다. 밥먹는 걸 방해하거나 가만히 쉬고 있는데 뒤에서 건드리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이빨을 드러낸다.
때문에 그동안 자괴감 많이 느꼈다. 가끔 인적 없는 뒷산에 풀어놓을 때도 신경이 쓰였고 애견카페나 애견운동장 같은 곳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꼬리를 흔드는 개는 무용지물이라는 건 요즘 철 지난 인식이다. 이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개가 대세. 따라서 우리 개는 구시대의 유물로서 인구 대비 도둑놈 수가 예전의 1/10로 떨어진 요즘 하릴없이 집만 잘 지키고 있다.
난 피해의식이 생겼다. 주말에 동네 천변길에 나가 보면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선남선녀견들을 데리고 나와 한 자리에 어우러져 뛰어노는 장면이 흔히 펼쳐졌고 난 우리 개의 타협하지 않는 성정을 떠올리며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곤 했다. 얘는 다른 사람도 싫어하고 다른 개도 싫어한다. 관심이 없어 굳이 가서 공격하진 않지만 다가오는 건 질색한다. 그저 혼자 인적 없는 산에 가서 뛰어노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난 얘를 위해 가끔씩 차에 태워 사람이 잘 안 가는 야산에 풀어놓고 함께 산행을 했다. 차에서 내려 등산로 입구에서 목줄을 풀어주는 순간부터 주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정신없이 산을 헤집고 다니는 걸 보면 영락없이 가축으로 진화하기 이전의 야생 금수다.
공감의 순간은 있다. 한참을 달리다가 아차 하듯 떡 멈춰서 뒤를 돌아볼 때. 별 거 아니지만 내 딴엔 감동적이다. 적어도 쟤가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 정도는 하는구나. 맨날 받기만 하던 애인이 어느날 싸구려 열쇠고리를 하나 사 왔을 때의 벅찬 감동 쯤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그런 아이컨텍 하나 받고 난 많은 것을 반성한다. 순종이란 미명아래 성격과 지병까지 획일화된 반려견 세상에서 비교적 자유연애에 의해 종족이 계승된 토종 개의 까칠함과 예측불가 성격을 한탄하며 사랑스럽던 강아지 시절을 괴롭게 떠올렸던 나의 한심함. 개는 주인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편리한 고정관념을 신봉하며 한때 훈련소를 알아봤다가 비용 때문에 포기한 나약함. 그런 식으로 따지면 자기 방 노크 안했다고 부모한테 버럭 소리 지르는 사람 자식도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지.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개성을 이토록 짓밟아서야 쓰나. 뭐 이런 식으로 생각들을 정리해갔다. 녀석의 체중은 25kg. 내 체중은 83kg. 어차피 언제든 힘으로 제어가 가능하다는 여유도 한 몫 했다. 만약 얘가 5,60kg 나가는 대형견이었다면 아마 문제가 좀 더 심각했을 것이고 생각 정리도 다른 방향으로 갔겠지만 말이다.
그 애의 몸에 혹이 생겼다. 찝찝한 마음으로 방치했는데 혹이 점점 커지고 딱딱해졌다. 그리고 몸의 다른 곳에도 작은 혹들이 더 생겼다. 동네 동물병원 몇 군데에 문의해 보니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답이 똑같다.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심각할 수도 있다. 일단 데리고 와봐라.>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딱히 의사의 자질을 의심할만한 말도 아니었다. 나 같아도 그렇게 말했겠다. 다만 요즘 우후죽순처럼 동물병원들이 생겼고 환자 유치에 혈안이 되어있다는 게 맘에 걸렸다. 그래서 한 다리 건너 지인을 이용했다. 실력이 없더라도 최소 과잉진료는 하지 않겠지. 전화해서 예약을 잡고 개를 차에 태웠다. 얘는 오랜만에 산에 가는 줄 알고 들뜬 표정으로 차창 밖 풍경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평소보다 오래 달렸는데 산이 나오기는커녕 더 복잡한 도심으로 차가 진입하자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소위 천재견은 아닐지라도 꽤 영리한 편이라 오늘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 했다. 아무리 경험이 없어도 개들은 개장수와 수의사는 알아본다 했던가.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예방접종을 맞은 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병원 앞에서 얘는 버티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히 달래다가 포기하고 완력을 사용했다. 질질 끌고 병원에 들어가 수의사, 그러니까 지인의 지인에게 인사를 했다. 너무 젊어 보여 불안했지만 얼굴과 팔에 난 흉터들이 그나마 신뢰감을 보충해줬다. 당연하지만 녀석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적대감을 표현했고 그들은 긴장했다.
피를 뽑고 기본 처치를 하는 동안 잔뜩 긴장해서 이빨을 드러내는 애를 꼭 껴안고 있어야 했다. 마취제 투여 후 불과 10여 초 만에 스르르 무너진 후에야 온전히 수의사에게 맡길 수 있었고 약 한 시간에 걸쳐 혹 제거 수술을 받았다. 조직검사 결과 악성이 아닌 단순 지방덩어리로 판명됐다. 다행이다. 수술대에서 내려온 애의 몰골을 보니 총 네 군데 주먹만한 넓이로 털이 깎여나갔고 칼자국과 함께 실로 꿰맨 자국이 있었다. 마취가 덜 깨 혀를 길게 뺀 모습이 처연했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며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약이야 밥에 잘 섞어주면 되겠지만 문제는 얘가 상처에 입을 대는 것이었다. 아프면 핥을 것이고 가려우면 긁을 것이다. 그걸 막으려면 상처로부터 입을 차단시켜야 한다. 그래서 애견용 깔때기를 사은품으로 받았다. 이걸 목에다 씌우면 불편하고 답답하고 보기에도 우스꽝스럽지만 최소 일주일은 씌워놔야 한댄다.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니 마취가 덜 깬 지금 아예 씌워가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난 아무 생각없이 뒤로 미뤘다. 미리 얘기하자면 그 아무 생각없음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때는 7월이었다. 덥고 습했다. 무작정 이물질을 장착하기보다 나름 큰 시술을 받았으므로 시원한 곳에서 기력을 보충하고 밥과 물도 먹인 뒤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상황을 지켜봤더니 밥과 물을 먹고 기력을 보충하는 듯 싶더니 이내 상처를 핥기 시작했다. 적당히 핥다가 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착각이었다. 비로소 할 일을 찾았다는 듯 하염없이 핥더니 잠시 후엔 앞니로 실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싶어 바로 깔때기를 집어 들었다. 투명 아크릴로 만든 커다란 판떼기가 접근해오자 얘는 처음엔 평범하게 경계했다. 그러다 그게 목에 둘러지고 조여오자 위기감을 느꼈는지 강하게 뿌리쳤다. 그래그래 싫겠지. 하지만 우린 종이 달라서 니가 상처를 핥으면 안된다는 걸 언어로 납득시킬 수가 없단다. 자, 다시 하자. 녀석은 좀더 강하게 뿌리쳤다. 혼자서는 안되겠다 싶어 아내더러 얘를 잡고 있으라 했다. 아내는 얘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힘을 줬다. 그랬더니 얘도 온몸으로 반항했다. 고개로만 뿌리칠 때와 몸 전체가 시위할 때는 차원이 달랐다. 결국 실패했다.
얘는 이제 깔때기를 악마로 인식했다. 다가오는 기미만 보여도 온몸의 근육을 총동원할 기세였다. 그걸 보며 나도 눈빛이 빛났다. 오랜만에 피어나는 개척자 정신. 자길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데 저토록 거부해? 자식아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넌 기껏 25kg, 난 무려 83kg. 짐승의 어드벤티지를 감안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원래 승산 있는 싸움이 짜릿하잖아.
아내에게 깔때기 씌우기 임무를 맡기고 난 녀석을 뒤에서 안았다. 그리고 앞다리 윗부분, 인간으로 치면 이두근의 상단에 팔을 감고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녀석은 다시 온몸의 근육에 발동을 걸었고, 세기의 대결이 시작됐다. 아내는 고래 싸움의 새우 마냥 손을 떨었고 아크릴판의 구멍에 단추를 끼우지 못해 애를 먹었다. 대결은 더 치열해졌다. 녀석은 뒷다리로 땅을 차면서 하체를 들어올리고 고개를 숙여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했고 나는 아예 마운트 자세로 내 가랑이 사이에 얘 하체를 넣고 강제로 주저앉혔다. 내가 자기 뒷다리를 무력화시키는 틈을 타서 얘는 어깨와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고 아내는 가까스로 맞춘 구멍을 다시 놓쳐버렸다. 난 한 팔로 녀석의 앞다리를 싸잡고 남은 손으로 목을 조르듯이 틀어쥐면서 몸무게를 얘 척추에 완전히 실어 다시 주저앉혔다. 녀석은 포기하지 않고 엉덩이를 옆으로 틀며 내 압력으로부터 하체를 빼낸 후 몸을 뒤로 후진시키며 내 팔에서 탈출하려 했다. 놓치진 않았지만 내 팔은 얘의 앞다리에서 가슴과 목을 거쳐 얼굴 근처까지 밀려났다.
피!!
아내가 소리쳤다. 잠시 정신줄을 놓은 것 같다. 내려다 보니 하얗던 개가 빨간 얼룩개가 되어 있었다. 내 하얀 티셔츠도 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실밥이 터진 것이다. 당황한 나는 팔을 풀고 녀석의 상처를 살폈다. 총 네 군데의 꿰맨 상처 중 네 군데가, 그러니까 전부 다 터져 피를 뿜고 있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일단 지혈을 시켜야했다. 당황하여 상처를 눌렀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패닉 상태로 동물병원에 전화를 했다. 터진 상처를 보여달란다. 급히 사진을 찍어 전송했다. 실밥이 다 터진 게 아니니까 일단 상처를 계속 소독하랜다. 솜에 소독약을 묻혀 상처를 닦았다. 얘는 그걸 또 핥았다. 다른 쪽을 소독했더니 거기를 또 핥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한동안 소독약을 먹였다. 그러다 보니 피가 멎었다. 이어진 의사의 지시대로 깔때기 대신 사람 윗도리를 입혔다. 혹시나 벗겨낼까 싶어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깔때기보다 훨씬 우스꽝스러워졌다.
퍼뜩 어떤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얘를 상대로 최선을 다했다. 인생의 목표가 이 만큼 한 점으로 모아진 사례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집중했다. 그렇다면 녀석은 최선을 다했을까? 근래 보지 못한 저항을 목격했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얘가, 깔때기가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싫었다면, 저걸 피하기 위해 그 어떤 것도 할 기세였다면, 조금 전 했던 수많은 동작 중에 이빨도 포함시켰어야 하지 않을까? 이빨까지 안 가고 단지 으르렁 위협만 했어도 내 집중력은 산산이 깨졌을 것이다. 얘는 그걸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가뜩이나 성격도 안 좋아서 가끔씩 주인한테도 으르렁대던 애가 그 절체 절명의 상황에서 말이다.
이후 내 인생을 다소 바꿔 놓을 두 개의 깨달음을 얻었다.
1. 동물과 사람의 유대 관계는 기존의 사람 관계에 대입시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
소위 피로 이어진 가족 관계, 주고 받는 계약 관계, 호르몬 작용에 기인한 연인관계와도 다른 그 어떤 무엇이라는 것. 때로는 옆집 아저씨보다 하찮고 때로는 직계 가족보다 치명적인 이상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선사한다. 오늘은 그 한쪽 끝 스펙트럼을 경험했다. 피로 물든 티셔츠를 벗으며 강하고 묘한 감동이 몰려왔다.
2. 동물의 피지컬은 사람보다 다소 우월한 게 아니라 차원이 다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 남쪽의 생태계를 비교하면 언제나 참담했었다. 가끔 절대 야생의 숲속을, 긴장하며 통과하는 상상을 했고 그럴 때마다 돌멩이나 나뭇가지로 맹수에 대항하는 내 모습을 그렸다. 아무리 무책임한 상상이라 해도 나름의 선을 지켜 사자 호랑이 표범 곰 등을 다른 차원으로 놓고 늑대 멧돼지 시라소니 하이에나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로 설정했었다. 지독한 착각이었다. 80kg 넘는 멍청한 몸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날 남다르게 배려하는 25kg짜리 야수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게 팩트였다. 겸손이란 말은 자신을 실제보다 낮게 인식하는 것. 난 이제야 자연 앞에서 날 바로 보게 됐다. 앞으로 산에 갔다가 새끼곰이나 삵이나 유소년 멧돼지나 청설모 가족을 보면 정중히 사과하고 도망쳐야겠다.
밥에 섞인 약을 먹고 우스꽝스러운 사람 옷을 입고 조용히 쉬고 있는 나의 개에게 난 속삭였다.
“그동안 날 많이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