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 Aug 26. 2023

느리게 가면 보이는 세상

5. 자전거 국토종주 편

"엄마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돼?"

"음. 사랑도 기쁨도 슬픔도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겠지."

"슬프지 않으면 좋은 거 아니야?"

"만약에 말이야. 마음이 아프면 꺼내서 얼룩을 지우고 햇볕에 널어 잘 말리면 돼. 다음 날이면 깨끗하게 마른 마음으로 편안해질 거야."

-윤정은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중에서 -


현실에서도 마음 세탁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다시 번아웃이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도 사람이 문제였어요. 사람들을 마주하기가 싫으니 대화를 이어 나갈 수가 없어요. 상대방의 눈은커녕 얼굴조차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동료의 배려로 3일 휴가를 냈습니다. 참 고마운 분이에요. 하루의 준비시간을 갖고 바로 다음 날 새벽 집을 나섭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가 될지 모를 일이니까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려보고 싶습니다. 인천에서 부산까지는 자전거 길로 630km예요. 국토종주 인증메달이 목표는 아닙니다.


체력을 다해 도로를 달려요. 몸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렇게 하면 좀 마음이 가벼워질 거 같아요. 허락 없이 들어와 자리하고 있는 마음의 쓰레기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들을 버려야겠어요.

사진출처: pixabay

날씨가 참 좋은 시월입니다. 동트기 전 어두운 새벽녘에 자리한 찬 공기가 무척 상쾌해요. 폐부로 들어간 찬 공기가 떨림과 기대를 만납니다. 기분 좋은 설렘이에요. 공항철도를 이용해 공덕역으로 향합니다. 한강변 자전거도로로 진입하기가 수월해요. 출근 시간 전이라면 자전거를 타고 공항철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강변을 지나서 경기도 여주를 지나고 충청북도를 지나 강원도 원주에 도착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시, 도가 바뀌어요. 참 신기한 경험입니다. 아름다운 경험이에요.

충북 충주
문경새재
문경 불정역
경북 상주
상주 자전거 길
경북 의성군

 힘차게 페달을 밟아 두 개의 바퀴에 의지해 계속해서 공기를 가르고 달립니다. 긴 업힐 코스로 악명을 떨치는 소조령과 이화령이지만 이곳에서 느낀 환희와 카타르시스를 잊을 수 없어요. 무아지경의 경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단언컨대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짜릿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던 스카이 다이빙도 이보다 짜릿하진 않았어요.

소조령 오르는 길
이화령 휴게소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에서 올라옴

보통 걷는 속도가 4~5km가 나옵니다. 페달을 밟아 업힐 구간을 오를 때 속도계를 체크해 보니 5~10km 정도가 나와요. 그냥 걷는 게 낫겠습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정상까지 한 시간을 넘게 오릅니다. 자전거를 끌고 걷기도 합니다. 그냥 걸으라면 그렇게 어려운 구간이 아닌데, 자전거를 타고 오르려니 더 힘들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헛웃음이 나더니 그때서야 비로소 주변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왜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을까요? 고개를 들기만 하면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하늘인데요. 대한민국의 하늘과 산이 참 아름답습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온몸으로 마주한 바람의 냄새와 감촉을 잊을 수 없습니다. 땅에서 피어난 바람이 나무들 사이로 흘러 산과 대지, 그리고 제 몸을 어루만져요. 온몸이 바람에 젖은 그 순간만은 저도 산에 일부가 됩니다. 마음에 있는 노폐물들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마음이 성장합니다.

국토종주를 마치고 느낀 점 세 가지가 있습니다. 느리게 가면 보이는 세상이 있어요. 대한민국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어느 유럽 못지않은 절경이 많아요. 빠르게 달려야 했기 때문에 보지 못했습니다. 삶의 무게추가 '회사의 오늘'에 가 있었어요. 회사의 KPI는 제 인생의 KPI가 아닙니다. S나 A의 인사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내 인생이 S가 되는 것 역시 아닙니다. 회사에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제 삶의 목적이 아닌데, 실상은 그렇게 살고 있었어요. 무엇보다 세상이 이렇게 넓고 굳건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저는 한 평 남짓한 제 책상의자에 앉아서 오늘을 소모하고 있었어요.


내리막길이 나온 뒤에는 오르막 길이 나옵니다. 반대로 오르막길 후에는 여지없이 내리막 길이 나와요. 내리막길이 나온다고 좋아할 것도 아니고, 반대로 오르막길이 나온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국토 종주를 하는 동안에 참 많은 업, 다운 힐을 만났어요. 작은 언덕부터, 한 시간 이상을 올라야 하는 어려운 고갯길도 있습니다. 몇 번의 업 힐 구간을 지나고 나니 내리막길을 만나면 이제 걱정부터 됩니다. 몸은 편한데, 마음이 영 불편해요. 이내 곧 오르막 길이 나올 걸 알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만나는 호사와 행운 앞에서 겸손하겠습니다. 나쁜 일과 불운을 마주했을 때는 더 힘을 내겠습니다. 자존감을 잃지 않아도 돼요. 지금은 조금 힘들겠지만, 오르막 길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삶 속에 스트레스는 주관적일 수 있어요. 도시를 벗어나 만나는 이 아름다운 여유와 공간도 누군가에는 반복적인 보통의 일상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스러운 스트레스는 존재하겠지요. 사람이 원래 현재에 만족할 줄 모릅니다. 인류와 사회가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나의 상황을 불평이라는 강박 속에 가둘 필요는 없어요.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참 중요한 일이에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도 다툼은 있나 봅니다.

상주시 낙동면 참 아름다운 강변 자전거 길에 있던 편지..

반복된 일상과 업무로 지친 나머지 번아웃이 온 걸 자각하지 못합니다. 일상의 익숙함에 가려져 있어서 지금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에요. 수면을 통해 뇌 속에 있는 노폐물들을 제거한다고 합니다. 마음속 노폐물을 제거하려면 수면만으로는 부족해요.


때로는 능동적인 풍파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작은 도전의 나비효과로 오늘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3일의 시간이었지만 '느림'을 통해서 새로운 용기와 쉼이라는 기적 같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느리게 갔을 때 보이는 세상이 있어요. 이제는 알겠습니다.




사진 출처 - 새로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아래는 종주에 필요한 준비에 대한 글이에요.


※자전거 선택

자주 타던 자전거로 가세요.

로드바이크의 얇은 타이어조차도 펑크 위험이 높지 않습니다. 고압력이기 때문에 펑크위험은 낮아요.

고가의 자전거가 있다면 체력을 아낄 수 있습니다. 부담은 덜해요. 그렇다고 반드시 고가의 자전거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제일 친한 자전거랑 함께 하시면 됩니다.

MTB, 로드, 전기 자전거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미니벨로로 종주하시는 분도 봤습니다.


※ 하루 주행 거리 선택

정비가 잘 되어 있는 국토 종주 길이 많아요.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루의 주행 목표 거리입니다. 기대치보다 30km 정도 짧게 설정하시는 걸 추천해요.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80% 체력을 최대 한계치로 잡으시는 게 좋아요.

자전거 도로는 도시를 지나가기도 하고, 숙소가 없는 한적한 곳을 지나기도 합니다. 미리 목표 거리에 맞게 숙소를 봐두시는 게 좋겠지요. 경로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저녁이 되면 체력이 급격하게 소진돼요.

첫날은 충주 모텔, 둘째 날은 구미 게스트하우스, 셋째 날은 부산 모텔을 이용했습니다.

구미를 지나서 위치한  #강변하우스 게스트하우스는 추천하는 숙소예요.

하루 3만 원의 비용으로 숙박과 저녁식사까지 해결이 됩니다. 시설도 아주 깨끗합니다. 국토 종주길 근처에는 자전거 종주 전용 게스트 하우스가 많이 있어요.

문경새재를 지나게 되면 경로 중간중간에 픽업 가능한 게하 현수막과 홍보 명함이 자주 눈에 띕니다. 악마의 속삭임 같은 달콤한 광고예요. 픽업차량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20~40km 점핑을 할 수 있다고 홍보하는데, 잘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복귀 수단

인천에서 부산을 자전거 도로로 왕복하면 1400km예요. 돌아갈 때는 교통수단을 이용합니다.

7~8일을 그렇게 달릴 여건도 안 되겠지만, 시간이 되어 달린다고 하면 병원에 며칠 누워계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KTX를 이용하려면 자전거의 타이어 정도는 분리해야 합니다. 초보자들이 하기 어려워요.

고속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분리, 해체 없이 실을 수 있습니다. 저도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라이딩 준비물-연양갱, 보조배터리, 물, 수리키트

당이 많이 부족합니다. 에너지 소비가 워낙 크니 당을 채워줘야 합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연양갱. 이게 최고예요. 진짜 힘 다 떨어졌다 싶을 때 그냥 한 입 베어 물면 그냥 웃게 됩니다.

#행복나눔자전거 앱을 미리 설치하세요. GPS 덕에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보조배터리도 챙기셔야 해요. 배터리를 많이 잡아먹습니다.

생수는 여유 분으로 한 개 더 준비하고, 이동 중에 물을 채울 수 있는 장소에서는 계속해서 보급해 주세요.

잠깐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도로 컨디션은 훌륭합니다. 수리키트까지 구매하셔서 짐을 키우실 필요는 없어요. 폰 하나면 다 해결돼요. 응급 상황 시에는 근처 바이크 숍을 검색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엉덩이 패드, 무릎 보호대

장기간 라이딩은 라이더들의 소중한 엉덩이와 무릎을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인터넷 검색해서 적당한 패드로 준비하세요.

내 엉덩이는 소중하니까요. 패드와 보호대는 완주 가능성을 대폭 올려줍니다.


※일정 짜기

650km를 4일에 완주하기 위해서는 하루 170km를 달려야 합니다. 5일로 한다면 130km로 줄일 수 있어요. 제 주위에 있는 보통의 남자들은 스스로를 참 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것이니 긍정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만, 객관적인 평가도 중요해요.

시속 20km 속도로 달린다면 5시간을 꼬박 달려야 100km를 달릴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마저 고려한다면 하루 150km라는 거리가 그렇게 짧은 거리는 아닙니다. 과신은 금물이에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