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차박 캠핑 편
"산을 오를 때 밑에서 보면 정상에 다 온 것 같아 이제 정상이다 하고 발길을 턱 내디디면 오르는 길이 탁 나오는 거야.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면 또 길이 나오고. 다 된 것 같아도 또 남은 게 있고 또 남은 게 있어. 인생이란."
-김진명 <직지> 중에서-
등산같은 삶이에요. 30대, 40대의 엄마 아빠들은 참 바쁩니다. 가족을 꾸리고 아이들의 성장을 도와야 해요. 사회에서는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성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직책에 대한 욕심과 적당히 가지고 있는 욕심과 열정으로 부서에서는 꽤 핵심적인 업무를 맡기 시작해요. 워크홀릭을 꿈꾸었던 것은 아닌데 어느 순간 돌이켜 보니 워크홀릭으로 보낸 시간들이네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놓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소비했던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에요. 그것은 시간에 대한 소비적 측면의 불균형에서 시발한, 사랑하는 이들과 공유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고 있는 지金에 대한 불만족입니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까지 1996년을 시작으로 세 번의 큰 경제 위기가 있었어요. 경제를 예측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부동산가격이 오를 때 환호하던 자들이 당시 미국 3,4위이던 리먼브라더스, 메릴린치가 파산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올 것을 과연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반복되는 경제의 불안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몰두하도록 만듭니다.
당장 내일의 내 일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지금의 급여가 내일을 보장하진 않으니까요. 그러니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측 불가능이라는 불안감을 회사에 바치는 충성이라는 수단으로 자위하며 잊어가는 거예요. 조직 안에서의 직책과 칭찬욕이라는 유혹에 만취하여 깨어보니 불혹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라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숙취는 습관의 흔적으로 남아 여전히 더 높은 직책과 칭찬을 갈구하기도 합니다. 습관이 참 무서워요. 어쩔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여러 숙취제를 복용하며 오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해요.
회사와 일에게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배당한 채 주말을 보냅니다.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함께하지 못하니 아이들과의 짧은 놀이에도 쉽게 피곤합니다. 내가 즐겁지 못한 놀이가 아이들에게 즐거울 리가 없어요.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지경에 이르고 그제서야 캠핑을 시작합니다. 자연으로 향했어요. 편하고 익숙한 각자의 공간이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짧습니다. 아이들과의 놀이에 한계도 있어요. 편하고 익숙한 각자의 공간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얼마 못 가 각 작의 방으로 스며듭니다. 저도 제 방이 편하거든요. 언제가부터는 주말에 쉬고 나서도 몸과 마음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변화가 필요해요. 속도와 시스템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보드게임과 물멍, 산멍이 게임과 영화를 대신합니다. 그네와 미끄럼틀 대신 물장구를 치고, 곤충을 찾아봐요. 추운 겨울 밖에서 먹는 라면은 별다른 레시피가 필요 없습니다. 같은 장소지만 자연은 모습을 바꿔가며 나를 반겨요.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니 자연에게 다칠 일도 없습니다. 여행이라는 큰 선물보따리를 풀어 보면 늘 새롭고 정겨운 갖가지 색의 선물들이 들어 있어요. 아이들을 마주하고 수다를 떨다 보면 무엇이든 꼭 빵 하고 터집니다. 소소한 즐거움이 켜켜이 쌓이면서 아이들과 '함께'라는 기억이 생겨요.
많은 기억을 추억하는 시간들이지만 능동적인 불편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텐트 설치 등의 땀 흘릴 시간이 필요하고 캠핑을 마친 후에는 장비의 관리도 필요하거든요. 조금 운이 나쁜 날에는 무례하고 시끄러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죠.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캠핑장인지 야시장인지 모를 그런 곳에서 몇 번의 불쾌함을 겪은 후부터는 인적이 많지 않은 조용한 노지를 찾게 됐어요.
내무부장관님의 동의와 허락을 받아 빠른 결단을 합니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존재는 큰 동력이었어요. 서둘러 스타렉스 자동차를 중고로 구입해서, 캠핑카 제작을 의뢰합니다. 한 달간 봐 둔 업체가 있었는데, 노지 캠핑에 최적인 캠핑카로 개조했어요. 간단한 식사를 위한 전자레인지, 겨울 차박을 위한 무시동 히터, 편안한 수면을 위한 2층 침대, 선풍기 등의 사용을 위한 넉넉한 전기를 갖춘 자동차가 만들어졌습니다.
일과 도시를 떠난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공을 즐깁니다. 경제적 활동은 삶을 지탱하죠. 경제적 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할 방주(方舟)를 만들었다면 그 안에 넣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친구가 될 수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는 한 잔의 술만큼 달콤한 것은 없습니다.
차량 경적소리, 도시에서 파생되는 소음을 대신하는 것은 그 수를 알 수 없이 많은 새들의 소리입니다. 서울 촌놈으로 자라 앎이 적은 저로서는 알고 있는 새라고는 참새와 비둘기뿐입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키우셨던 십자매라는 새도 있지만 잘 기억이 나진 않아요. 참새~ 짹짹 밖에 모르는 얄팍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과 새에 관련한 책도 함께 읽어 봅니다. 자연의 한자 풀이는 自스스로, 然그러함입니다. 자연의 소리는 참 아름다워요.
불멍과 취사는 자연에 상처를 줍니다. 캠핑장 같은 장소가 아니라면 불은 피우지 않아요. 땅과 산, 나무에게 맑은 기운을 받으면서 그들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더 인적이 없는 곳을 찾게 돼요. 나의 쓰레기는 물론 눈에 보이는 쓰레기까지 함께 담습니다. 자연에 들어갔을 때의 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야 해요. 잠깐 머물다 오는 주제에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전국을 다니면서 마흔 번 정도의 차박 여행을 다녔네요. 긴 여행에서는 숙소와 차박을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능동적인 불편함이라고는 하지만 그 또한 너무 강박일 수 있어서요. 3박 이상의 여행을 할 때는 문명이 주는 편안한 숙소와 섞는 것도 좋았습니다.
딸아이는 여전히 장난꾸러기예요. 무시무시한 중3이지만 여전히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난 마흔 번의 차박 캠핑으로 켜켜이 쌓은 시간들로 방황스러운 사춘기도 잘 지나갔어요. 불편했겠지만 일상이 주는 행복을 눈치챈 큰 아이에게 참 감사해요. 아이는 성장하면서 더욱 지혜로울 겁니다.
저는 이제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쉬고 있는 주말이지만 목표와 성과, KPI, 분기평가, 인사고과, 워크숍, 회의 같은 단어로 가득했던 머릿속은 이제 상당 부분 청소가 됐어요. 쉬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예상하지 못하고 갑자기 불쑥 찾아오곤 했던 공황장애가 사그라들면서 사람에게 다친 마음들을 많이 치유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가짐과 호흡이었겠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의 자연에서의 머무르는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밤하늘에 놓인 수많은 별들 아래에서 있자면 그야말로 자연의 영험함과 치유력에 순응하게 돼요.
캠핑과 차박이라는 것은 사실 수단에 불과합니다. 자연과 느림을 즐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나의 오늘을 보내며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와 마음가짐이에요. 저는 그것을 차박이라는 수단을 통해 얻은 것이죠. 잠깐이라도 느린 시간을 머물면서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느리고 불편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일을 준비할 하나의 힘이 되기도 해요.
갈수록 더 빠르게 도파민을 얻길 원하는 요즘입니다. 책보다는 영상을 선호하고, 그 영상마저도 갈수록 짧아지며 자극적인 형태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도파민 중독시대에요. 이미 충분히 빠른 시간인데, 한 번쯤은 사랑하는 이들과 마주하며 조금 진정하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사진출처 : by 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