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을 아시나요?
출근하자마자 자료 달라고 하지 좀 마세요. 빌게이츠도 그렇게 빨리 못해요.
화병은 화, 분노, 억울함, 우울 등의 감정이 억눌려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지속되어 정신적 증상이나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미국정신의협회에 haw-byung 이라고 한국어 표기 그대로의 이름으로 등재된 적도 있어요. 국위선양이라고 반길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화병은 U22.2 질병코드로 등록되어 있네요. 아픈 감정을 담아두기만 하니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화병(火病,홧병).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병이에요.
화병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회사의 칭찬과 동료의 인정에 중독되어 일할 때였어요. 어려서부터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직장인이 된 후에도 농구, 야구, 축구 등 운동은 계속해서 즐겼습니다. 같이 뛰고 놀던 친구 중에는 프로배구 선수 출신도 있었는데, 국가대표 출신의 친구에게 체력만은 국대급이라고 인정을 받을 만큼 잘 뛰어다닐 때였어요.
얼굴이 돌아갔다고 표현하죠. 편마비가 왔습니다. 서른여덟 살이었어요. 정신적 억압은 건강하던 체력을 삽시간에 제압합니다. 안면마비는 다행히 3개월 만에 회복됐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공황장애를 얻었고, 신체적으로는 좌측시력이 극단적으로 나빠졌어요.
화를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비상식적인 상황'을 '상식적으로' 넘기는 그들의 시선엔 제가 이상합니다.
"도대체 왜 그래?"
화의 근원인 회사 사람들로 인해 제 삶이 소진되고 있어요. 그 사이에도 화는 계속해서 쌓입니다. 악순환의 염증은 결국 곪아서 터져 버려요. 사람들이 너무 싫었습니다.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가 너무 끔찍했어요. 이기적인 그들의 자기 합리화가 모두 저를 겨냥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변화와 수용을 싫어하는 조직들이 있어요. 불편한 진실은 꺼내지 않습니다. 수면 위로 띄우지 않아요. 그냥 안주하는 것이 편할 테니까요. 제가 몸 담은 회사는 이와 같은 성향이 매우 강한 곳입니다. 이상하고 비상식적이지만, 지금껏 그렇게 해왔으면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해요.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겠지요. 동료들 눈에 저는 무모하게 보였을 겁니다.
"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 왜 혼자 유난을 떨어? 그냥 조용히 있어."
500년도 더 전에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말합니다. 아첨에서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방법은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도 당신이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그 당시에도 아첨이 리더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인지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2023년입니다. 500년이 넘도록 읽히는 책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여전히 많은 사무실에서는 출근이 시작된 아침, 아첨꾼의 인사와 웃음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립니다.
경제생활을 하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불합리를 모두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 또한 저의 주관적 잣대가 적용될 테니 저의 기준과 고집은 다른 이에게는 역시 동일한 스트레스가 되겠지요. 사회생활에서의 대인관계를 논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맹자의 말씀처럼 불확실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단단한 호연지기로 내면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겠지요. 우리가 취사 선택하여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문제는 화병이에요. 화병의 근원은 덜어내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노가 쌓이는 이유도 있겠지요. 제가 비록 전문 정신의학과는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아파봤으니까 더 잘 알 수도 있어요.
화병은 덜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화가 축적되어 생기는 것입니다. 화를 덜어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화를 덜어낼 방법이 필요합니다.
haw-byung (질병코드 U22.2)은 질병입니다. 치료가 필요해요. 순종적이고 부지런한 대한민국의 일꾼들은 여전히 화를 덜어낼 시간이 많이 부족합니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묻지마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아요.
정권이 바뀌면서 ‘주 69시간제’ 기사를 많이 접했어요. 정치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제 얘기를 하는 겁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출근은 빠르게’와 ‘퇴근은 여유 있게’ 문화가 강한 나라예요. 나아지고 있는 인식의 변화가 반갑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여전히 일찍 출근하는 직원은 업무의 능력과 자세를 떠나 좋은 평가를 받아요. 칼퇴근을 하는 직원을 두고 시간 내 업무처리가 확실하다고 평가하는 상사는 없습니다. 설사 지금의 직장 상사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그 의식을 배우고 자란 새로운 꼰대들이 또 그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출근은 일찍. 퇴근은 늦게.
어느 회사 문서에도 찾을 수 없겠지만, 많은 회사가 가지고 있는 공통 인사규정이죠. 이미 ‘주 69시간제’가 시행 중인 곳이 존재하는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회와 회사는 우리 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야지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스트레스는 절대로 스스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화는 관대한 녀석이 아니에요. 사라진 척 조용히 숨어있다가, 언제고 그 몸집을 키워서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맙니다. 절대로 화를 담아두지 마세요. 저마다의 성격에 맞게 스스로 화를 덜어낼 방법을 꼭 찾으세요. 멀지 않은 곳에 많은 즐거움들이 있을 겁니다. 제가 찾아보니 온통 재미투성이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늦은 거라더군요. 그런데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요. 본인에게 잘 맞는 방법과 모양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뭐든 마음의 문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