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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Nov 16. 2023

너는 아줌마냐, 아가씨냐?

이장 할아버지가 내 결혼이 궁금한 이유.

오랜만에 모 이장님이 오셨다. 그는 풍채가 좋고 목소리가 크고 호탕한 스타일이었다. 우리 지점 과장님은 그를 '사또'라고 칭하는데, 내가 보기엔 사또라기보단 배부른 칭기즈칸에 더 가까운 이미지다. 나는 이 이장님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내가 아주 풋풋하고 어리고 순진했을 때(훗), 나를 접대부 취급하던 이장들에게서 유일하게 나를 사람 대접해 주던 이장님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이야기도 푸는 날이 오겠지.  때문에 나는 다른 지점에 가서도 그를 잊지 않았었는데. 다시 이곳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도 이장이었던 그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이곳에서 이장을 하고 있었다.


다시 봐서 반갑다는 인사를 주고받은 것도 잠시였다.


"야, 나 하나만 뭐 물어보자."

"네. 말씀하세요."

"너는 아줌마냐? 아가씨냐?"


무례하다면 엄청나게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은 70대로 추정(아, 이장님. 제가 이장님 연세를 모르는군요!)되는 할아버지다. 어떤 불순한 의도는 없음을 안다. 심지어 나는 20대 때에도 자녀의 나이를 묻는 질문을 받았던 전적이 있는 터라, 별 타격 없이 받아칠 수 있었다.


"아가씬데요?"

"거짓말하지 마라!"

".... 네?"


아니... 지금껏 애가 몇 살이냐는 질문이나 남편이랑 사이가 좋냐는 식의 질문은 들어봤지만... 미혼이 거짓말이라는 반응은 엄청나게 신선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나는 당황스럽고 웃겼다. 그러나 이장님은 내 말이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옆에 있던 후배 직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 니가 말해봐라! 야, 자 시집갔제?"

"안 갔습니다."

"너도 거짓말하네!"

"아니, 이장님! 어디 가서 속고만 사셨어요? 안 갔다니까요?"

"아닌데. 안 갔을 리가 없는데. 아가씨가 이렇게 추례하게 하고 다닐 리가 없는데."

"....."


옷차림의 문제였나. 그래도 출근길엔 나름 챙겨 입는다고 입는데?


나는 강경하게 미혼을 주장했지만 이장님은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그렇다 다시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장님은 몇 번이나 나의 기/미혼을 물었고, 나는 미혼이라 대답하고, 이장님은 의심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오늘. 나와 다른 직원, 단 둘이 있는 사무실에 이장님이 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화가 잔뜩 나 있는 이장님. 나는 그렇게 그를 돌려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아 가벼운 대화로 기분을 풀어주었다. 잠시 후, 마음이 풀어진 이장님은 내가 내민 비타 500을 단숨에 들이켜며 내게 말했다.


"좀 있으면 너도 또 가제?"


농협은 보통 겨울에 정기 인사가 있는 편이다. 이 지점에 온 지 1년이 넘은 이상, 나 역시 정기 인사 시 이동 대상에 오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지난번에도 4년 반이나 있지 않았던가?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왜요? 저 벌써 쫓아내려고요? 이제 다시 온 지 겨우 1년 넘었는데?"

"쫄따구들이 다 그렇지."

"하긴 제가 쫄따구긴 하죠."

"너 농협 들어온 지 이제 한 3년 되었나?"

"저 처음 여기 올 때 2년 차였고, 5년 있다가 갔잖아요. 4년 만에 다시 와서 이제 1년 되었는데. 저 농협 들어온 지 10년도 넘었거든요?"

"뭐야? 그렇게 오래되었어?"

"그렇지요."

"흠. 어쩐지 너도 많이 늙었더라."

"...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늙어도 예쁘다고 해줘야지!"

"아니다. 늙었다. 그래. 이제 솔직히 말해봐라, 시집 갔제? 아줌마제?"


와, 이 화두가 여기서 나올 줄이야! 


"아, 진짜 아니라니까요?"


그러자 이장님이 옆의 직원에게 말을 건다.


"야, 니가 말해봐라. 야, 시집 갔제? 아줌마제?"

"결혼 안 했어요."

"... 진짜가?"

"진짜거든요?"

"아닌데. 아가씨가 저러고 다닐 리가 없는데."

"...."


나는 10년째 쌩얼 고수하고 있고, 오늘은 추워서 주유소 잠바를 실내에서 입고 있었다. 도대체 이장님 머릿속에 든 아가씨는 도대체 어떤 이미지인 걸까? 문득 내 전임자가 생각났다. 그녀는 나와 아주 잘 지내는 미혼 동생인데, 그 아이는 항상 풀메이크업을 하지만 화장을 하지 않아도 피부가 엄청 좋고, 얼굴도 예쁘고, 미용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옷차림이 항상 예쁘고 단정했다. 흠, 내가 원래도 좀 아줌마스러운 스타일이긴 한데 걔랑 비교하니까 찐 아줌마긴 하군. 그러니까 전임자가 잘못한 거지?


"그렇구나. 진짜 결혼 안 했구나."

"안 했다니까요."

"... 그래. 난 네가 그러고 다니길래 틀림없이 결혼했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면서도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청첩장 한번 안 주고 결혼한 줄 알고 그랬는데.... 안 갔으면 됐어."


이장님이 내 눈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어쩐지 조금 울컥해져서 황급히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하면 꼭 청첩장 드릴게요. 저 축의금 줘야 하니까 적금 많이 들어놓으세요?"


그러자 이장님은 아무 말도 없이 웃더니 손만 흔들고 사무실을 그대로 나가버렸다. 나는 떠나는 이장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야 그가 내 결혼 유무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건 내 환장할만한 아줌마 스타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유일하게 참여할 수 있는 내 인생의 이벤트(!)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를 좋아했던 것만큼 그도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서 헛된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꽤 괜찮은 목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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