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민의 길티, 데자부, 이데아를 중심으로
“이 글은 태민의 <길티>, <데자부>, <이데아> 3부작을 중심으로, 죄의식과 자아 타자화, 철학적 구원에 대해 탐구한 글입니다.”
누가 내게 태민의 음악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곡이 뭔지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없이 길티, 데자부, 이데아를 꼽을 것이다. 세 곡은 음악적 완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태민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서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길티가 이제 막 선악과를 맛 본 인간의 죄의식을 다룬 곡이라면, 데자부는 선악과를 베어 물기 전, 모든 게 연결되어 있었던 태초의 세계를 표현한 곡이다. 그리고 이데아는 태초의 세계, 그 끝에 위치한 모든 존재의 기원에 대한 노래이다. 오늘은 이를 전제로 길티와 데자부 그리고 이데아가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편의상 길민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이건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여기서 '길민'은 길티와 태민을 합친 것으로 길티의 세계관 속 태민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는 그 자체로 타자로부터 분리된 주체, 즉 ‘나’라는 인식을 상징한다. ‘나’라는 인식은 선과 악, 이성과 본능, 과거와 미래 등 모든 이분법의 출발점에 위치한다. 상술한 대립항은 모두 타자로부터 분리된 주체가 없다면 성립할 수 없는 도덕률이자 관점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고 ‘나’라는 인식이 생기는 순간, 하나의 존재가 발 딛고 있던 세계는 굉음을 일으키며 갈라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길민이는 이제 막 ‘나’라는 인식에 눈 뜬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선악과를 먹은 뒤, 그의 눈 앞에 보이는 건 한때는 한 몸 같은 존재였으나 이제는 타자일 뿐인 시설 속 친구들, 그들이 행한 악, 청산해야 할 과거 뿐이다. 그들의 대척점에는 선을 행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그들과 분리된 주체인 내가 존재한다. 태초의 인간을 닮은 길민이에게는 이분법의 극단성을 완화하고 누그러뜨릴 완충제도, 방어막도 없다. 그는 그런 유연성에 필요한 사회적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걸 불태우고 떠났다. 영원히 갈라진 세계에 스스로를 내던진 것이다. 결국 그 자신이 영원히 봉합되지 않을 내상을 입을 줄도 모르고.
그 일 이후, 갈라진 협곡과도 같은 길민이의 심연 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피어올랐다. 선을 행했음에도 죄의식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을 위한 악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무엇이 선과 악의 경계를 결정짓는가 등등. 장난감 자동차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자신의 행적을 찬찬히 되짚어봤을 길민이가 도달한 곳은 결국 이 모든 의문의 시작점, 선악과였을 터. 그는 무엇이 ‘나’를 ‘나’로 인식하게 하는가를 질문했을 것이다.
그렇게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펼쳐진 게 바로 데자부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듯이, 데자부는 댄서들이 무릎 꿇고 앉아서 손을 앞으로 뻗는 태민이를 가리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댄서들은 길민이가 단죄한 것들-타자, 과거, 악을 상징한다. 즉, 데자부는 길민이가 심판한 것들이 역으로 길민이를 옥죄는 구도로 시작된 것이다. 이는 길민이를 데자부의 세계로 들여놓은 것이 죄의식임을 보여준다. 한편 자신이 죽인 과거의 망령들에게 둘러싸여 손을 앞으로 뻗는 길민이에게는 복합적이고도 절박한 감정이 느껴진다. 데자부의 문 앞에서 그는 무언가를 항변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그저 선을 행하려고 한 것 뿐이라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 것뿐이라고.
문을 열고 들어간 데자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래에서 과거의 날 발견”할 수 있고, “과거에서 미래의 날 마주”할 수 있으며, 이성과 본능이 찻잔 속 태풍처럼 소용돌이친다. 무의식의 공간에서 과거와 미래가, 이성과 본능이, 주체와 타자가 서로 꼬리를 물고 순환하며 영원을 그린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블랙홀로 시간 여행을 떠난 조타수처럼 팔을 힘껏 돌려보는 것뿐이다. 그렇게 영원의 궤도를 따라 돌며 모든 감정을 초월한 듯 암흑 속을 유영하던 길민이는 떨쳐내지 못한 단 하나의 감정이 있음을 깨닫는다. 기시감이라는 이름의 막연한 그리움. 그리고 그 그리움의 대상은 바로 이데아이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데자부의 안무는 ‘이데아’를 찾으려는 몸짓인 듯 하다. 태초에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던 때에 존재했던 이데아의 파편화된 그림자가 곧 인간의 자아니까. 플라톤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유한한 시간 속에 위치하기 전에 모든 사물의 원형, 즉 이데아를 보았으며, 그 기억에서 파생된 것이 인간의 앎이다. 즉, 이데아를 목격한 경험과 그로 인한 기시감이 인간 이성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평생 존재 이전의 상태에서 보았던 광경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인간은 영원한 것을 향해 그 자신을 던져서 망아忘我의 상태에 다다를 때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이데아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경험한 인간은 이성의 기원인 기시감의 정체를 쫓아 모든 것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데아론의 가르침이다.
이런 점에서 길티, 데자부와 이데아의 서사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선악과를 먹고 죄를 저지른 인간이 죄의식의 심연에서 태초의 존재를 만나는 이야기,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모든 존재의 기원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되는 서사가 바로 길티-데자부-이데아의 서사인 셈이다. 이것은 어쩌면 매우 처절한 자기 구원의 서사이다. 길민이는 선과 악의 경계가 허물어진 폐허에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자기 인식을 끝까지 밀어붙였고,끝내 자신을 타자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 태초에 모든 존재는 주체와 타자의 구분 없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자신은 그 광대한 우주의 먼지일 뿐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는 먼지도 그 자체로 우주이다. 그 사실이 길민이를 다시 현실로 소환했을 것이다.
길민이는 그렇게 데자부의 세계로 나아가 이데아를 만나는 깊은 꿈을 꿨다. 현실 속의 그는 여전히 고통 속에 놓여있다. 정돈되지 않은 냉장고 속 식자재들, 충동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수영장 근처의 물웅덩이들, 침대 위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장난감이 그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지 않는다. 자기연민을 한꺼풀 벗겨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도입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데자부의 마지막 장면이 그 증거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가리키는 과거의 망령들 사이로 손을 뻗지 않는다. 같은 듯 영원히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자기 인식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만날 수 있는 타자화된 내가 나를 구하는 이야기. 길티, 데자부, 이데아는 그런 거대하고도 미시적인 구원과 순환의 서사를 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타자화된 나이고, 스스로를 타자화하기 위해 인간은 늘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를 구하는 건 나로 표현되는 온 우주이다. 세 가지 곡을 통해 태민이 전하고 싶은 메세지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