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의 “귀여운 여인(1899)”을 읽고
“귀여운 여인”은 체호프의 대표적인 단편 중 하나로, 주인공 올렌카의 사랑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올렌카는 홍조를 띤 통통한 뺨과 건강한 자태로 남자들에게는 미소를, 여자들에게는 감탄을 안겨주는 그야말로 생기 넘치는 인물이다. 또한 “그녀는 늘 누군가를 사랑했으며 ,달리는 살 수 없(p.197)”다고 묘사될 정도로 마음속에서 사랑이 흘러넘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올렌카의 사랑은 네 명의 인물에게 향한다. 첫 번째 인물은 극장 지배인인 쿠긴인데, 그는 저속한 코미디만 찾는 관객들을 욕하고 비를 내리는 하늘을 탓함으로써 극장의 적자를 합리화하는 다소 비겁하고 비관적인 인물이다. 그는 극단 업무를 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가 사망하게 된다. 두 번째 인물은 지주 같은 차림새를 하고 다니고 주변인들로부터 “훌륭하고 견실한 남자(p.201)”라는 평을 받는 목재 집하장 관리인 푸스토발로프이다. 그는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중시하지만 오락을 가까이하진 않으며 가정에 충실한 부유한 남자다. 어이없게도 그는 감기에 걸려 죽게 된다.
세 번째 인물은 육군 수의사 스미르닌으로, 올렌카의 집 별채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다. 유부남인 그는 올렌카와의 관계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며, 이에 약간은 고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대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연대와 함께 멀리 떠나는 것으로 작별을 고한다. 마지막 인물은 부모로부터 모두 방치된 채로 지내는 스미르닌의 어린 아들 사샤이다. 그가 올렌카를 떠나는지 여부는 작중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확실한 점은 그가 올렌카의 애정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네 인물 사이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없다. 이들은 직업, 가치관, 경제적 지위, 올렌카를 대하는 방식, 심지어 나이의 측면에서도 모두 다르다. 성별이 유일한 공통점이지만 “브랸스크에서 한 해 걸러 찾아오곤 하던 고모(p.197)” 또한 애정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별도 유의미한 기준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공통점은 이들이 아니라 올렌카에게 있다. 올렌카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아의 경계를 허물어 상대방의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애정을 쏟기 시작한 올렌카의 자아에서는 그녀 자신‘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애정의 대상이 바뀔 때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그녀의 자아에서는 이전의 상대와 결부될 만한 것, 추억이라 불릴 만한 것, 옛사랑으로부터 왔지만 이제는 그녀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것 등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쿠긴과 함께일 때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극장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하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핵심적인 것(p.198)”이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푸스토발로프를 만난 뒤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목재 사업을 해온 것 같았고 세상에서 목재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p.202)”이라고 믿게 되었으며, 수의사와 사랑에 빠졌을 때는 가축병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다. 스미르닌이 떠나자 “어떤 것에 관해서도 의견을 낼 수 없었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p.208)”던 그녀는 사샤와의 조우를 통해 애정과 더불어 자신의 의견을 되찾는다. 긴 공허함의 끝과 새로운 애정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이 “섬은 물로 완전히 둘러싸인 땅덩이다”라는 것이 다소 의미심장하지만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올렌카가 동화되고자 하는 대상의 존재감은 희미해지는 데 반해 그녀의 존재감은 커진다는 점이다. ‘극장, 목재, 가축’, 혹은 ‘쿠긴, 푸스토발로프, 스미르닌’의 존재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올렌카와 그녀‘만’의 애정 방식이다. 올렌카가 반복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지우면 지울수록, 그녀‘만’의 ‘고유’한 사랑의 방식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에 형체도, 경계도 없는 올렌카의 자아는 육중하고 비대하며,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게 된다.
우리는 어린아이인 사샤가 내뱉는 잠꼬대를 통해 그러한 위협을 실감할 수 있다. 평소에 볼멘소리로 올렌카의 일방적인 사랑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던 샤사는 잠꼬대로 그녀를 향해, 자신을 짓누르는 무한한 애정을 향해 얼른 꺼지라고 외친다. 갈 곳 없는 처지의 사샤는 얼마간은 이렇게 가위눌린 채 살아가겠지만 언젠가는 올렌카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스미르닌이 떠났을 때보다 더 긴 세월의 침묵과 공허를 견디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떠나갈 때마다 그녀가 슬픔에 잠긴 기간은 3개월에서 6개월로, 반년에서 몇 년으로 배가 되어 늘어났기 때문이다. 사샤의 입에서 나와 올렌카에게로 옮겨진 “섬은 물로 완전히 둘러싸인 땅덩이다”라는 문장은 그녀의 외로운 운명에 대한 일종의 예언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올렌카를 외로운 섬의 운명으로 이끌 역설적인 삶의 방식은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자의식은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의식하게 되는 존재와 잊으려 할수록 잊기 어려운 기억과 마찬가지로 역설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가령,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면 갈수록 스스로의 위치나 평판에 대해 과도하게 의식하게 되는 현상을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되는 ‘나’의 범위는 넓어지는 반면, ‘나’만의 고유한 내면세계는 좁아지는 자아의 역설적인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자의식의 범주가 좁아지는 동시에 넓어지는 이러한 과정은 올렌카의 존재가 지워지는 동시에 깊이 각인되는 과정과 매우 닮아있다.
올렌카가 스스로를 지우는 사랑의 방식으로 인해 고립되었듯이, 내면세계를 좀먹는 인정욕구에 대한 갈망은 우리를 외로운 운명으로 떠밀 수 있다. 어디서부터 올렌카, 그리고 우리의 삶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우리는 “섬은 물로 완전히 둘러싸인 땅덩이다”라는 체호프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페이지 표기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어크로스, 2023)“를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