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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Apr 28. 2023

[D+10]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

가오슝


 여행을 편하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내 (혼자) 여행 스타일을 말하자면, 경주마랄까. 앞만 보고 걷는다는 말이다. 남들은 휴양지로 간다는 치진섬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페리를 타고 10분 정도 들어가면 치진섬이 나온다. 페리 앞 좌석에서 바람을 맞으며 도착했다. 출발은 좋았다.


Gushan Ferry Pier Station


 보통 전동 바이크를 빌려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지나가며 보니 죄다 2인용, 4인용 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패스하고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이상하다. 평일이라 그런지 휴양지 느낌보다는 그냥 작은 바닷가 마을 같다. 백사장 주변을 따라 걸었다. 모자를 챙겨 오길 잘했다. 바람이 불지만 그래도 내리쬐는 해가 뜨거웠다.


 그렇게 3시간을 걸었다. 모르겠다. 가오슝에 오면 필수로 들려야 하는 코스라는데, 이게 맞나? 조금 더 예쁜 곳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며 걸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런데 바다는 어디서 보나 그 장면이 그 장면이다. 점점 감흥이 떨어진다. 왔던 길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웠다. 이런 걸 매몰비용이라 하나. 오기로 그냥 계속 걸었다. 구글맵을 검색해보니 타고 온 페리 선착장 말고 앞으로 더 걸으면 다른 선착장이 있었다. 그걸 타고 가야지. 목표가 생기니 조금 기운이 났다.


 


 선착장까지 30분 정도 남았을까. 가는 길에 파이 가게가 있어 잠시 들렀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일단 어딘가에 앉고 싶었다. 현지인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집인지 손님이 계속 들어왔다. 직원에게 어떤 것이 베스트 메뉴냐 물으니 블루베리란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拿鐵咖啡 冰的 나티에카페이 빙더 (카페라테 아이스)도 한 잔.


 앉아서 뭐라도 마시니 살 것 같다. 얼굴은 바다 바람을 맞아 그런지 가렵고, 온몸은 땀 때문에 진득거린다. 얼른 먹고 가야지. 카페라테 맛은 굉장히 밍밍했다. 원 샷인가? 커피향이 은은하게 났다. 빵은 맛있었다. 시트가 퍼석할 줄 알았는데 굉장히 촉촉했고 블루베리 필링도 적당히 달아 딱 좋은 정도였다. 숙소 가까이 있었으면 자주 사 먹었텐데. 조금 아쉽다. 가격도 저렴하다. 커피 55위안, 빵 25위안. 사실 대만도 물가가 그렇게 싼 편이 아니라 저 빵이 더욱 가성비 있게 느껴졌다.


 잠시 체력보충을 하고 다시 걸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정말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런데 점점 시골 마을의 정취가 물씬 나는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 도착한 곳과 생각보다 차이나는 분위기에 잠시 당황했다. 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래. 잠시 필리핀에 살았을 때 생각이 났다. 필리핀 친구네 집 동네 분위기가 이랬다. 쌩쌩 달리는 오토바이와 차들, 그리고 양 옆으로 지어진 집들과 상점들. 그래도 여긴 도로포장이 잘 되어있다. 필리핀 친구네는 차와 트라이시클이 달릴 때마다 모래바람이 일었다.



 이곳은 여행객이 전혀 없다. 터벅터벅 걷는 나를 사람들이 흘깃 쳐다본다. 이상하겠지. 반대편으로 가면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는데. 역시 어딜 가나 이렇게 된다. 어이가 없어서 혼자 웃었다. 관광객들이 많은 곳보다는 언제나 조금 동떨어진 곳으로 걸음 하는 DNA라도 있는 모양이다. 나도 좀 즐기고 싶었는데. 휴양지 치진섬.


 그래도 여기까지 와본 사람 얼마나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오면 언제나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다. 뭐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걸. 그런데 웃기게도 이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 아, 나 여행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거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여행이라기보다는 고행이다.


Zhong Zhuo Ferry Station


 드디어 도착한 페리 선착장. 그런데 이게 맞나 싶었다. 매표소도 없고 그냥 저 건물에 화장실과 의자만 덜렁있다. 잠시 당황하다가 문을 통과하니 부두가 보였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뿐인 것처럼 보였다. 문신한 아저씨들 몇 분이 낚싯대를 바닷속에 집어넣고 계셨다. 최대한 공손한 표정으로 땅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바로 옆이 파출소였고, 나 이후로 몇 분이 오셔서 배를 기다리셨다. 한시름 놓았다.



 몇 분 있으니 저 멀리서 배 한 척이 오는 것이 보였다. 금방 부두에 배를 댔다. 현지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우르르 내렸다. 역시나 관광객은 없다. (이쪽 배는 보통 현지분들이 애용하시는 것 같았다.) 비워진 배를 놓칠세라 냉큼 올라탔다. 요금은 어디서 내는가 했더니 배 안에 이지카드(교통카드) 찍는 기계가 있다.


 

 대략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걸었다. 다행히 종아리는 괜찮은데 발바닥이 저릿하다. 그래도 이곳에서 배를 타니 좋은 점이 하나 있다. 보통 저 왼쪽 (구산 페리역)에서 타면 나가는 사람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데 이곳은 나 포함 채 10명이 되지 않아 바로 타고 나갈 수 있었다.




 배 위에서 보는 일몰이 예뻤다. 내가 걸어온 쪽은 배를 만드는 조선소들이 몰려있는 곳인 듯했다. 페리를 타고 나가는 중에야 알았다.


 그렇게 10여분을 타고 내린 곳은 또 전혀 처음 보는 곳이다. 다행히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단다. 버스가 오는 것 맞나? 의문이 드는 비주얼이었지만 다행히 정류장이 맞았다. 오기로 한 버스는 15분이나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버스가 온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대만 버스는 우리나라 버스처럼 칼같이 시간 맞춰 오지 않는 듯하다.)



 그렇게 무사히 숙소에 도착. 오늘 하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토끼굴에 다녀온 기분이랄까.


 내게 치진섬은 단순히 휴양지가 아니었다. 그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사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이런 맛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 되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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