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동
여행동안 처음으로 낮잠을 잤다.
어제(그리고 이제까지) 하도 걸어서 그런지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일어나 보니 날도 우중충하고, 별로 돌아다니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일단 배는 고파서 아침에 세븐일레븐으로 출근했다. 길에 앉아 산 음식을 먹었다.
나의 대만 최애 음식, 옌마이나티에(오트라테)와 샐러드 그리고 블루베리치즈 샌드위치. 그런데 이 세븐일레븐에서 타주는 라테는 맛이 없다. 다른 지점보다 밍밍한 것 같다. 그래도 주변에 세븐일레븐이 여기 한 곳이라 다른 선택지가 없다. 블루베리치즈 샌드위치는 그냥 흰 식빵에 잼이랑 크림치즈를 발라준 것인데 나름 맛있다. 샐러드는 언제나 평타는 친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나니 더더욱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숙소로 돌아가 남은 라테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일찍부터 빤 수건을 접고 계셨다. 숙소가 매우 깨끗하다. 3층 건물인 이곳의 계단에는 정말로 먼지 하나 없다. 모두 그녀의 수고 덕이리라.
1층 로비에서 책을 읽다가 더워서 3층에 내 침대로 올라갔다. 어제 꽉 찼던 방엔 모두 나가고 나밖에 없다. 완전 전세 낸 기분이다. 유유자적 책도 읽고 인터넷도 하다가 한 숨 자볼까, 하고 정말 오랜만에 낮잠을 잤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대만에서는 개들도 낮잠을 자는데. 처음으로 대만에서 자는 낮잠이다.
한 시간만 자려던 것이 두 시간이 되어버렸다. 12시 40분쯤 잠들어 눈을 떠보니 2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준비해서 4시 버스를 타고 나가 일요일에만 열리는 Siwei 야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막상 준비를 하다 보니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막판에 뛰어서 버스에 무사히 올라탔다. 20분쯤 달려 타이동 버스터미널 역에 내렸다. 20분 정도 걸어가야 야시장이 나온다. 구경도 할 겸 천천히 걷기로 했다. 날이 우중충하니 역시 길이 덜 예뻐 보인다.
그렇게 야시장에 도착. 딱히 당기는 게 없어서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궁금한 국수 발견. 작은 컵 하나를 시켰다. 국수에 곱창과 굴 몇 개를 넣어주었다. 맛은 심심한 간장맛. 은근 중독성 있다. 한 그릇 다 비웠다. 가격은 40위안.
국수가 짭짤해서 그런지 이번에는 단 게 당겼다. 아까 걸어오다가 본 고구마볼을 사 먹어 보기로 한다. 가격은 한 봉지 35위안. 막 튀겨내고 있는 중이라 2분 정도 기다렸다.
다 먹고 하나 남았을 때 아차 싶어 찍은 사진. 맛은 겉은 바삭하고 안은 쫀득하다. 식감이 우리나라 동글동글한 찹쌀 도넛(안에 팥이 들은)과 비슷하다. 대신 이건 안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냥 쫀득하다. 그래도 고구마맛도 나고 살짝 달짝지근한 게 맛있다.
야시장 구경을 하는데 바람이 꽤 많이 분다. 어제는 그렇게 덥더니 오늘은 바람 부니 살짝 쌀쌀하다. 대만 날씨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일요일인데 길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고 나도 일찍 숙소에 돌아가고 싶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PX마트가 있길래 간단히 장을 보기로 했다.
아. 왜 나는 여길 이제 왔을까.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 가격의 절반 값이다. 이제까지 편의점에서 사 먹은 게 얼만데. 살짝 억울하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돌릴 순 없다. 길게 여행한다면 앞으론 PX마트에서 장을 봐야겠다. 물건도 좋고 값도 싸다. 베이커리도 매우 저렴했다. 배만 안 불렀어도 사고 싶은 빵이 많았는데 배도 부르고 내일 화련으로 떠날 예정이기에 사지는 못했다.
오늘 쇼핑 목록은 대만 파인애플 맥주 작은 캔 하나,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새우볶음밥 하나, 망고&피치 요거트 2개 묶음 하나. 이렇게 샀는데 132위안이 나왔다. 한화로 대략 5700원 정도. 편의점이었으면 이미 200위안이 넘었을 거다. 대만 물가가 생각보다 비싸다고 생각했던 게 내가 편의점을 너무 자주 갔던 탓인 것 같다. 우리나라도 편의점 물건 가격이 비싼 것처럼. 미니 바나나 4송이에 1000원 정도 하길래 사 오고 싶었는데 다 먹지 못하면 내일 짐이 될 것이기에 포기했다. 시간만 좀 더 있었어도 완전 먹부림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렇게 숙소에 돌아와 새우볶음밥을 돌려 먹었다. 기대 안 했는데 엄청 맛있다. 밥알도 푸석하거나 퍼지지 않고 딱 좋다. 밥알이 살아있다 해야 하나. 대만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즉석식품이 잘 나온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먹은 걸 치우고 방으로 돌아와 대강 짐을 쌌다. 내일 화련으로 갈 참인데,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해서 조금 고민이 되긴 한다. 그래도 이제 타이동에서 보고 싶은 건 다 본 참이라 내일 아마 화련으로 떠나지 싶다.
타이동에게 빚을 진 느낌이다. 이곳에서 좋은 기운을 너무 많이 받아서. 덕분에 남은 여행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대만에 온다면 그때는 타이동에서만 지내도 좋겠다. 그때는 낮잠도 실컷 자고 마트에서 장도 왕창 봐올 테다.
내일은 화련으로 떠난다. 그곳에는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