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타이베이에서 처음으로 '덥다'라고 느낀 날이었다.
매일 우중충한 날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보는 해에 (그마저도 쨍하지는 않았지만) 피부 때문에 처져 있던 기분이 올라왔다. 날씨까지 우중충 했다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을 텐데. 날이 더우니 밖에 나가고 싶어졌다. 일단 쓸 수건이 없어 빨래를 해야 했다. 빨래를 돌려놓고 아침을 먹으며 어디를 갈지 생각하니 역시 가고 싶은 곳은 딱 한 곳이다. 금면산.
흐린 날 봤던 시내 전경이 못내 아쉬웠던 탓일까. 너무 좋았지만 해가 나는 날 꼭 한번 다시 오겠다는 말을 산에서 사귄 대만 친구에게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해가 난 것이다. 금면산에서 만난 대만 친구에게 라인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드디어 타이베이에 해가 났다고. 좀 있으니 답장이 돌아온다.
- 언니 준비됐나요?
- 등산!
역시 척하면 척이다. 當然。 (당란, 당연하지)
준비를 끝내고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왔더니 시간이 20분이나 남았다. 날이 좋아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골목이 예뻐 보여 잠시 걸어보았다. 거리 양 옆으로 나무가 나있으니 분위기가 너무 좋다. 조금 걸었는데 벌써 땀이 난다. 그래. 나는 땀이 나는 날씨가 좋다.
그렇게 짧은 골목 구경을 마치고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렸다. 대만 버스는 구글에서 알려주는 정보보다 빠르거나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정류장에 가 전광판에 몇 분이 남았는지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아직 8분이나 남아있다. 그래도 놓치지 않았으니 됐다. 시간이 되자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대만에서 버스를 탈 땐 타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여야 한다. 손을 들어 버스기사님께 보였다. 버스에 올라탔다. 이제 1시간을 넘게 달려야 한다.
버스에서 깜빡 졸았다. 어제도 잠을 잘 자지 못했는데 피부에 도움이 될까 오늘 하루 커피를 마시지 않은 탓이다. 어차피 1시간을 넘게 가야 하기에 마음 놓고 졸았다. 그런데 온몸으로 느껴지던 버스의 진동이 멎었다. 눈을 떴다. 버스가 멈춰 섰다.
기사님이 버스에서 내리더니 버스 뒤쪽으로 가 바삐 무언가를 확인하셨다. 그러다가 이내 승객들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하신다. 나는 알아들을 리 만무하고 다른 승객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버스가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내리라는 뜻인 것 같다. 타고 있던 승객들이 모두 내렸다. 다행히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다른 버스로 갈아탔다. 살면서 버스가 멈춰서 중간에 내린 적은 처음이다. 뭐, 안전제일이니까 다행일 수도.
버스에서 내렸는데 저번과 다른 버스를 타서 그런지 처음 보는 곳에서 내리게 되었다. 주변이 온통 큰 회사 건물이었는데 분위기가 흡사 우리나라 판교 같았다. 대만 굴지의 기업 엔비디아, 미디어텍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사들이 모여있었다. 금면산 앞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신기하다. 점심시간이라 목에 사원증을 걸고 돌아다니는 회사원들도 많았다.
산에 가기 전에 요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원래는 세븐일레븐에서 파는 마키를 사 먹으려 했는데 갑자기 수박이 너무 당겨서 수박 하나 사 먹고 출발했다. 달고 맛있었다. 가격은 49위안. 더운 날엔 역시 수박이다.
밝은 날 보는 금면산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역시 맑은 날 하는 등산이 좋다. 땀도 맘껏 흘릴 수 있고. 그렇게 두 번째 금면산 등산, 시작.
저번에 내려온 길로 오늘 올라가고, 올라간 길로 내려오기로 했다. 내려온 길이 경사가 매우 급해서 올라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날도 덥고 습하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쓰고 간 모자를 중간중간 벗었더니 바람이 머릿결 사이로 찬 기운을 넣어주었다. 아. 너무 좋다.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니 이런 뷰가 보인다. 역시 날이 좋으니 시야가 맑다. 저 멀리 뿌연 (미세먼지로 추정)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까운 건물들은 깨끗하게 보였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맛에 산에 오른다.
그래도 한 번 올라봤다고 저번보다 정상에 쉽게 오른 것 같다. 구름이 아주 멋있게 떴다. 오늘 월요일인데도 산에 사람들이 많았다. 북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후다닥 자리를 떴다. 내려가 간단히 요기를 하고 샹산에 야경을 보러 갈 예정이라 크게 지체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간 샹산. 샹산은 확실히 밤에 가야 하는 산인가 보다. 밤에 보니 훨씬 예뻤다. 사람들도 많아 밤에 가도 무섭지 않을 듯하다. 그렇게 샹산 야경까지 클리어했다.
오늘 산악인이 된 기분이었다. 해외까지 와서 산에 가냐 할 수 있지만 나는 어느 곳보다 좋다. 오랜만에 땀을 빼니 열심히 산 기분이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며 칠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