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다. 소설, 시, 음악, 영화, 그림.. 특히 수업 시간에 시를 배우며 그랬다. 시는 은유와 비유가 많아 직설적이지 않으니까. 선생님, 해설집이 설명하는 작가의 의도가 과연 정말 100% 맞을까? 궁금했었다.
창작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업으로든 개인적(사적)으로든. 저마다 해석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원작자의 의도는 이러이러하다.' '이러이런 걸 주장하고 있는 거다.' '이것은 그걸 뜻하는 거다.' 등.
그러한 해석들이 과연 100% 정확할까? 조금이라도 다를 때 원작자는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면서 느낀 게 있다. 글은 내가 쓰고, 글에 나의 주장 의견 생각 의도 메시지를 녹여내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걸. 난 A를 가리켰지만 독자는 B를 느꼈을 수 있다. 이는 글쓴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예컨대 열린 결말의 영화는 결말 해석이 무수히 다양하다. 그중 제작자가 의도한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관객도, 아닌 관객도 있다. 물론 그것을 제작자가 노렸겠지만.
창작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내용이 해석되고 이해되는 게 썩 달갑지 않을 수 있다. 애써 노력해 담은 메시지가 무시되거나 왜곡된다면 어찌 안 그렇겠나.
하지만 앞서 말했듯 작품이 자기 손을 떠나 소비자(감상자)에게 닿는 순간 이미 공은 넘어간 거다. 그때부턴 그들의 해석과 이해를 강요할 순 없다. 순전히 그들의 몫이다. 이는 창작자로서 받아들여야 할 숙명과도 같다.
최대한 잘 못 수용되는 걸 방지하려면 보다 더 확실하게 내용을 구성하고 메시지를 명료하게 담아내는 노력도 필요하겠다.
글을 쓰다 보니 최근 읽은 양희은 선생님의 <그럴 수 있어> 내용 하나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진다는 게 이런 걸까. 온몸에 소름이 돋아 머리끝까지 쭈뼛했다. 시위대가 한목소리로 부르는 〈아침 이슬〉은 내가 부른 그 노래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 노래가 이렇게 불릴 수 있을까? 이런 노래가 아닌데, 아닌데….’
내가 불렀던 노래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침 이슬>은 서울대 미대에 재학 중인 김민기 선배가 국립4.19민주묘지 근처에 살 때 만든 곡이다. 작업이 풀리지 않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작은 묘지들이 눈에 들어오더란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를 당시 엄마의 빚에 구덥을 치르고 있던 내가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는 가사 좋아 부른 노래였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김민기 선배가 “그 노래가 내 몸에서 나간 것이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라고 한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내 마음도 그랬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이게 노래의 사회성이구나’ 깨달아졌다. 노래는 되불러주는 이의 것이구나. 노래를 만든 사람, 처음 부른 가수의 것이 아니구나. 여러 번 굴절을 거쳐 어떤 가슴으로 불릴지는 누구도 점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수천수만의 〈아침 이슬〉이 있을 것이다.
- <그럴 수 있어>, 양희은.
모든 예술 작품은 그것을 접하고 소비(감상)하는 자들의 수많은 굴절을 거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원작자의 최초 의도는 조금이던 많이던 희석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작품의 사회성으로 인해 수만수억의 모나리자, 노인과 바다가 있을 것이다. 작품의 주인은 창작자가 아닌 소비자(감상자)일 수 있다.
내 글은 독자의 해석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내 글의 좋고 나쁨은 '독자'가 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