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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진 Jun 14. 2023

[숙박계]

-여행 가방에 넣고 싶은 시 3


숙박계

  -이덕규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 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 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               






    이제까지 나는 오로지 혼자만의 여행을 해 본적이 없다. 1박2일의 짧은 여행이라 해도 늘 누군가 함께였고, 대부분은 가족이었기 때문에 숙박계에 이름을 남기는 영광 같은 게 내 몫이 되지 않았었다. 실은 이렇게 말하고 나니, 지나간 시간이 살짝 억울해진다. 그럼 난 낯선 도시의 밤을 헤매다 골목 끝 여인숙의 작은 방 하나에 담긴 채, 울음보다 더 쿨럭거리는 그런 하루 없이 마냥 안전하고 따뜻한 날을 보낸 것처럼 보이는 게 억울한 것이다. 즉 나를 위한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후회가 이 시를 읽으면서 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여인숙 풍경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촌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먼 친척 분이 가까운 피붙이처럼 지냈던 고향에서 여인숙을 했기 때문이다. 심부름을 갈 일이 생길 때면 늘 오락가락 헤맬 만큼 긴 골목 끝의 낡은 집이었다. 간판도 없이 ‘여인숙’이라고만 대문에 흰 페인트로 적어 놓았던 기억이 난다. 김치 통을 내려놓고 그곳 마루에 앉아 친척 아주머니가 주는 요구르트 하나를 먹는 동안만큼만 머묾이 허락되곤 했었다. 어린 눈에 마당을 향해 있는 많은 방문의 안이 참 궁금했던 기억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간혹 늦게 일어난 손님이 세수를 하거나 밥을 주문하는 걸 보며 여행지도 아닌 이 산골에, 이 깊은 골목 안에서 하룻밤을 묵는 이유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기도 했었으니까. 어쩌면 그때의 마음이 이 시를 자주 펼쳐보게 했을 것이다. 그 궁금한 사연과 심정 같은 것을 시를 읽으며 조금 알게 되었다고 할까.     

 

    시 속에는 아무에게도 무슨 말로도 위안 받으려 하지 않는 한 사람이 보인다. 숙박계마저 마지막장에 이름을 쓸 정도로 늦은 밤까지 떠돌아야 할 사연이 있 듯한 사람.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의혹과 상처로 흔들리다 가뭇없이 들어선 길 끝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여인숙을 만났으리라. 그 순간 그 불빛과 낡은 집은 어떤 가슴보다 크게 한 사람을 안아주었을 것이다. 바깥은 여전히 칼바람에 눈이 휘날리지만, 그 같은 사람을 수없이 덮어주었을 “캐시밀론 이불”속에서 슬픔과 아픔을 녹이며 하룻밤을 보내는 일은 치유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새벽하늘의 별이 하나씩 사라질 즈음, “참 따뜻했네”라고 주인 몰래 마음의 인사도 적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들어올 때처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숫눈길을 걸어 또 떠나는 사람의 발자국이 “또박또박” 찍히는 풍경은 얼마나 쓸쓸한지... 시는 끝나도 풍경은 닫히지 않고 눈길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오래 전 이백도 말했다. “天地者 萬物之逆旅”, 즉 천지는 만물의 여관과 같다고. 하늘과 땅, 지구라는 여인숙의 숙박계에 이름 석 자를 써놓고 머무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시 속의 한 사람은 우리 각자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나는 이 시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또박또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간곡하고 지극한 것인 줄, 이 시를 읽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래서 나도 오늘은 또박또박 이런 마음만을 적어 보려 한다.

“당신들, 참 따뜻네”     

(이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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