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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린 Oct 10. 2023

백의 단벌신사 원장님들

특별한 의사가운 제작기 

백의 가운에도, 청/적색의 수술복에도 이유가 있다. 


'의사'라는 직업을 떠올려 보면 목에 무심한 듯 걸쳐놓는 청진기와 동시에 주머니에 펜이 한 두어 개 꽂아져 있는, 깃이 곧은 백색의 의사 가운이 떠오른다. 왠지 한 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을 것 같은 모습과 함께. 

'백의의 의사, 백의의 천사'라는 의료진을 칭하는 단어도 바로 이 하얀색의 가운에서 유래된 말들이다.  

의사가 '백의'를 착용하게 된 것은 놀랍게도 100년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의료에 있어서 위생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청결감이 느껴지는 흰 가운을 보급하게 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에 반해 '수술복'이라 하면 어두운 컬러가 떠오른다. 그중에도 청색이나 녹색 혹은 진한 적색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꽤 합리적으로 선정된 컬러들이다. 


진한 적색과 같은 경우, 예상했듯이 수술실에서 흔히 튈 수 있는 혈액의 컬러를 최대한 감추고자 함이다. 이는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수술 과정에서 의료진의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으려는 중요한 의도이기도 하다. 아무리 피를 많이 보는 수술진도 밝은 옷에 피가 튀는 일은 분명 잠시라도 시선이 옮겨 갈 가능성이 있을 상황이다. 

그리고 만약, 수술이 끝나고 내 가족이나 지인의 혈흔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수술복을 입고 나오는 의사와 의료진을 떠올려 본다면 (물론 수술의 결과가 제일 중요한 것이지만) 그들의 치열한 수술 과정을 환자와 그의 보호자에게 지나치게 연상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두운 녹색이나 청색의 수술복 역시도 혈액이 튀는 것을 표 내지 않기 위함도 있지만 실은 이 보다 더 심오한 뜻이 숨어있다. 사람은 신기하게도 선명한 붉은색을 보면 호흡과 심박수가 증가하고 덩달아 혈압도 상승되는 영향이 있다고 한다. 반면 파란색과 녹색을 보면 반대로 호흡과 심박수가 줄어들고 혈압도 떨어지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침전작용이 있기 때문에 녹색이나 청색의 수술복을 많이 입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과학적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손가락 끝의 소량의 붉은 피만 봐도 자지러지게 흥분하는(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피를 보는 순간 가슴이 매우 두근거린다고도 하고 심하게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도 한다. 이는 단순히 피를 봐서 놀란 마음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피'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부분과 동시에 신체적으로도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피야 피!! 라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을 유난이라며 비난하지 말아야 하겠다. 
의료인 관련 일러스트도 대부분 백. 청. 적색의 컬러들로 유니폼을 표현한다. @freepik





내 업무 중에는 병원의 유튜브를 설립하고 기획 관리하는 것도 나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렇다 보니 매 회 출연자인 우리 원장님의 의상 역시도 촬영 시마다 직접 신경 써서 준비하곤 했다. 주마다 며칠씩 있는 촬영일에 다양한 컬러의 옷을 입혀드리다 보니 영상 속 의상에 따라 원장님의 얼굴 톤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한 컬러의 의상을 입으실 때 보다 연한 핑크, 베이지와 같은 톤 다운 컬러들이 훨씬 얼굴 톤이 훨씬 밝아 보이고 잘 어우러져 보였다. 얼마 전부터 유행하는 '퍼스널 컬러'의 영향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된 나는 그날 이후로 의상의 컬러감을 신경 쓰며 준비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장님의 퍼스널 컬러는 여름쿨톤이셨던 것 같다는 생각.
(퍼스널 컬러 테스트를 해보시자고 제안을 드려보았지만 귀찮아하셨었다.) 


의료인의 유튜브이다 보니, 원장님은 자주 의사가운을 입고 촬영하시곤 했다. 

의사 가운은 통상적으로 새하얀 컬러의 빳빳한 재질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하얗디 하얀 가운이 애써 원장님의 의상을 잘 골라 입혀드리면 그 위에 툭 걸쳐지면서 얼굴톤을 되려 어둡게 만들어 버리곤 했다. 촬영 시에 사방에 켜놓게 되는 강한 조명들이 얼굴을 밝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가운에 조명까지 반사되어 버리니 얼굴에는 그림자가 진 듯 칙칙한 얼굴빛을 만들어 주는 것에 크게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영상 콘텐츠팀 직원들과 조명 위치를 요리조리 바꿔 보고, 때로는 마법 같은 편집기술도 활용해 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영상 속의 얼굴빛은 영 실물조차 담아내질 못했다. 본래 영상이라면 실제보다도 더 뽀얗고 밝게 나와야 하는 것인데.!




특별한 의사 가운 제작기


우리는 매주 적어도 두 편, 세 편 까지도 유튜브 영상을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환자들의 반응도 살펴볼 수 있고 구독자도 적지 않은 탓에 댓글이 한 편에 많게는 몇 백개씩도 달리곤 했다. 나는 종종 내가 직접 댓글을 살펴보면서 구독자들의 반응을 살피기도 하고, 컨텐츠팀 직원들에게 주기적으로 환자들의 피드백 댓글에 대해서도 보고를 받곤 했다. 


여느 때와 같이 댓글을 살피던 와중 몇 환자분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원장님 얼굴이 어두우세요. 요즘 피곤하신가 봐요~


안 그래도 고민하던 부분을 역시나 구독자들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 날 이후 유튜브 영상을 체크하는 나의 시선은 자꾸만 원장님의 얼굴빛에만 머물렀다. 게다가 이런 비슷한 내용의 피드백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통된 부분은 대부분 가운을 입고 촬영하신 영상의 댓글들이라는 것.


나를 더 고민되게 만들었던 이유는, 

유튜브 주제는 고용량 비타민C를 꾸준히 섭취하면 에너지 향상뿐 아니라 피부톤도 환해지는 것에 좋은 영향을 줍니다.라는 정보전달과 함께 원장님도 실제 해본 결과 효과를 많이 보았다.라는 사례를 설명하는 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영상 속 얼굴은 그렇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실제로는 굳이 바를 필요도 없는 비비크림을 촬영 전마다 발라드리면서  

조명을 추가해도 안 되고, 그래도 의료인 유튜브인데 의사가운 없이 촬영하기는 아쉽고.. 

차라리 가운을 바꿔버리자! 

라는 결단을 내렸다.


인터넷을 아무리 검색해도 백색 가운 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예상했던 부분. 아마 다른 색의 가운이 있다 한들 원하는 컬러의 의사가운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바로 맞춤 제작을 결정하고, 테일러샵 서칭을 시작했다.

  

원장님의 의사 가운 제작에 돌입하면서 생각한 몇 가지 기준들.

1. 움직임이 편해야 한다.
   원장님이 매일. 그것도 종일 입고 계신 옷이기 때문에 활동하기 좋아야 한다. 

2. 통풍이 잘 되면 좋겠다.
   의사 가운은 통상적으로 여름용, 겨울용이 따로 나눠져 있지 않다. 통상 봄/가을정도의 옷으로
   제작되는데, 그렇다 보니 여름이면 답답하다며 진료 중간중간 벗어두시곤 했다. 

3. 원단에 적당한 힘이 있어야 한다.
   의사 가운이다 보니 어느 정도 깃과 어깨에 각을 살릴 수 있는 제작이 가능한 원단이어야 한다.
 
4. (나에게) 제일 중요한 부분!
   톤 다운된 핑크톤의 컬러 혹은 옅은 베이지 컬러 원단이 사용 가능할 것. 

5. 위의 부분들이 충족되면서 당연히 디자인도 보기 좋아야 한다. 
   나는 허리라인을 살짝 들어가게 제작하면서 깃 라인을 따라 검은색의 트리밍을 넣고 싶었다.  

 

생각보다 이 모든 부분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원단과 기술을 갖고 있는 테일러샵을 찾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본래 목적이었던 다양한 컬러의 원단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그 원단의 기능적인 면과 디자인적으로도 실력이 좋은 샵을 알아내야 했다. 

맞춤으로 만들면 저렴하지도 않을 텐데, 원장님 마음에도 들어야 할 테니 내 옷을 쇼핑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눈으로 샵을 선정하고 방문했다. 원단도 직접 봐야 했기에 전화만으로 상담하기에는 불안하기도 했고.


A 샵에서는 마음에 드는 컬러에 통풍도 잘 되는 원단이 있었지만 하늘하늘 힘이 없는 탓에 그 원단으로 각을 살리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B 샵에서는 원하는 디자인 요소는 모두 들어줄 수 있는데 통풍이 잘 안 될 거라며 여름에 입기에는 더울 거라는 걱정스러운 멘트가 돌아오는 등.. 내가 세운 기준의 모든 부분을 충족시키는 것이 실로 불가능한 것인가 고민되는 시점이었다. 


어느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찰나, 

인터넷을 끝없이 뒤져보던 와중 재킷, 연미복을 많이 제작하는 곳을 찾아내었다. 업로드되어 있는 사진들을 보니 제작한 옷들이 내가 찾던 디자인의 가운과 비슷한 뉘앙스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가 상담을 하고 테일러샵에서 가지고 있는 수많은 원단 종류를 모두 만져보면서 마음에 드는 두께와 색상의 원단을 찾아낼 수 있었다. 통풍도 잘 되면서 적당히 힘도 있고, 어깨 쪽엔 패드를 넣어 각을 살리고 깃은 좀 더 빳빳하게 나올 수 있게. 그리고 사전에 생각했던 대로 허리 쪽은 살짝 라인을 넣고 멋스럽게 블랙 컬러의 트리밍을 깃에서부터 쭉 내려오게 요청했다. 모두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은 나는 병원으로 돌아와 들떠있는 상태로 원장님의 신체지수를 재어 보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발품 판 보람이 있었다. 


대략 2-3주간을 기다린 결과. 

그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primabela tailer / 톤다운된 흰색과 연한 핑크컬러의 두 가지 가운(재킷)을 맞춤 제작했었다.  




원장님 가운이 바뀌셨네요~ 잘 어울리세요!

의사 가운 제작의 첫 시작은 유튜브 영상에서 보이는 원장님의 얼굴 톤 밝히기가 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실제 진료실에서 입고 계신 모습을 볼 때에, 그리고 환자들의 좋은 피드백이 들려올 때에는 가슴이 뿌듯 뿌듯했다. 특히 연한 핑크컬러의 가운에 환자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확실히 다른 병원과 차별화되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원장님과 잘 어울리는 딸기우유색 가운은 긴장하며 진료실에 들어가는 환자들의 마음을 살그머니 녹여주기에 충분한 요소가 되어주었다. 원장님도 특별한 가운이 맘에 드신다며 강의 등 외부 일정에는 언제나 새로운 가운을 챙기고는 하셨다.


원장님들에게 의사 가운은 의료인으로서의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어쩌면 매일 입고 있어야 하는 '지겨운' 옷일 수도 있다. 

딸기우유 가운은 평생 입으셔야 할 새하얀 가운의 일상에 조금의 재미를 더해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 내 딸기색 가운 어디 있죠?' 하며 진료 전마다 찾으시던 원장님의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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