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의 음식을 먹어버린 청소부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제가 먹었는데 어쩌죠? 손님이 지금 매니저 불러달라고 난리예요."
트레이닝
신입 트레이닝을 맡은 날이었다. 청소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아무에게나 시키지는 않는다. 방을 배정받기 전까지 총 5일간의 트레이닝을 거치는데, 이 5일을 마치지 못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신입 하우스키퍼를 옆에 두고 냉장고 앞에 앉아서 음식을 주섬주섬 꺼내어 냉장고를 비우기 시작했다.
"체크아웃 한 방에서 이런 음식이 나오면, 개봉한 음식은 무조건 쓰레기통으로, 개봉하지 않은 것들은 네가 먹던지 집에 갖고 가던지, 아니면 휴게실에 두면 오가며 먹고픈 사람들이 집어먹는 거야. 너도 먹을래?"
웬 떡이냐
냉장고에 스트링 치즈, 요거트, 주스, 햄 등의 먹거리가 있었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에 너무 반가웠다.
숟가락도 없이 요거트를 입에 탈탈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마트에서 흔히 파는 초바니 요거트임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인 짜릿함이 더해지면 신비한 요거트가 된다.
위까지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배가 정말 든든해짐을 느꼈다.
주스도 꿀꺽꿀꺽 캬~
치즈를 까서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잠시 20대의 풋풋한 대학생으로 돌아가는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농활
정확히는 농민학생연대활동이다. 대학생 때 농활을 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새참을 머리에 이고 나오시던 생각이 난다.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질질 흘러가며 먹던 수박, 장떡에 막걸리 한잔이 그리도 꿀맛이었다. 흙 묻은 얼굴을 서로 봐가며 깔깔거리던 농활의 추억에 잠시 흐뭇해하고 있는데 손님이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왔다.
냉장고
손님은 숨을 헐떡이며 냉장고를 열었다.
"여기 있던 내 음식 다 어디 갔어요?"
나는 솔직하게 내가 추억을 되새기며 먹어버렸다고 말하지 못했다. 폐기처분 했다고 말했다.
"그럼 여기 쓰레기봉투에 아직 있겠네요?"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달라는 건가? 내가 먹었다고 하면 먹은 거 다 토해내라 할 판이다.
"죄송하지만 쓰레기는 이미 한번 비웠어요. 저희는 트레이닝받은 대로 청소를 합니다. 손님이 놓고 간 분실물은 한 달간 보관하지만, 체크아웃 한 객실에서 나온 음식은 따로 보관하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다시 장을 보려면 그게 얼마인지 알아요? 매니저와 얘기해야겠어요. 매니저를 불러줘요."
매니저가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라 슈퍼바이저에게 전화했다.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까?
사실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해도 바로 매니저를 부르지는 않는다. 모든 일에는 차례와 절차가 있다. 문제가 생기면 나의 직속 상사인 슈퍼바이저를 먼저 컨택한다. 슈퍼바이저 선에서 해결이 안 될 때 매니저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컴플레인하는 손님의 태도와 말 한마디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 충분히 기분 좋게 해결이 가능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하는 손님의 태도는 "너 따위는 됐고, 최고봉 불러와"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식해 보인다.
단호함
마리아는 멕시코에서 이민온 친구인데 수년간 하우스키퍼를 하다 슈퍼바이저로 승진했다. 영어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늘 당당하고 침착하다.
"마리아, 도와줘. 체크아웃 한 방에 있던 음식을 내가 먹었거든. 손님이 다시 와서 음식을 찾아. 매니저 불러달라는데 네가 지금 325호로 와줄래?"
마리아는 단숨에 달려왔다. 손님에게 매우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매니저는 주말이라 출근 안 했어요. 레이나가 한 말이 모두 맞아요. 우리는 체크아웃 한 방에서 나온 음식을 보관하지 않아요. 당신은 두 시간 전에 체크아웃했어요. 죄송하지만 지금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답니다."
손님은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마리아, 너무 고마워. 나 사실 너무 창피하고 무서웠어."
"괜찮아. Take it easy."
"너 손님한테 너무 차갑게 얘기해서 나 졸았잖아. 그 카리스마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
"어제 이미 한판 한 손님이야. 침대가 맘에 안 든다고 컴플레인해서 객실 교체해 주고 브리아나에게 조식 쿠폰까지 받아낸 사람이야. 일부러 그런 걸 수 도 있어."
설마, 함정은 아니었겠지. 할 일 없다고 체크아웃하고 두 시간 대기 타고 있다가 돌아오는 상습범은 아니었을 것이다.
손님이 내 눈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다리가 후들후들해지기 시작했다. 숟가락도 없이, 씹지도 않고 입으로 털어 넣었던 간식 때문에 심장이 쪼그라들었었다. 음식을 먹은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이제부터 객실 음식은 체크아웃 한 후라도 바로 먹지는 않기로 다짐했다.
타이틀이 주는 당당함
손님은 억울했을 수 도 있지만, 나의 행동에는 불합리함이 없었다. 음식을 훔쳐먹은 게 아니다. 죄를 지은게 아니라면 당당해도 된다. 마리아처럼 말이다. 마리아에게는 슈퍼바이저라는 타이틀이 있었기에 손님을 단호하게 엘리베이터로 보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체크아웃한 지 두 시간이 지난 후 음식물을 없앴다고 화를 내는 것은 분명 어이없는 태도이다. 내가 청소부여서 함부로 대한 것이기도 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손님은 되려 나에게 사과를 했어야 했다.
교수가 하는 일들은 참 다이내믹하다. 나도 사람인지라 일을 하다 보면 미스가 날 때 가 있다. 아무리 실수가 있어도 교수에게 무례하게 따지는 사람은 없다. 실수는 인정-사과-수정을 거치면 깔끔하게 해결이 된다. 슈퍼바이저를 불러야 하는 억울함이나,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학생에게 아쉽게 굽실거려야 할 일은 없다.
나도 누군가의 가족
아, 내가 정말 생계를 위해 청소를 해야만 했더라면 이 또한 서러울 수가 없었을게다. 우리 엄마나 내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내가 더 속상했겠다. 청소부 유니폼을 입고 손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얼마 전 한국에 다녀왔다. 아이들 여권을 갱신해 주러 구청에 갔었다. 창구 앞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앞에 있는 공무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어떤 타이틀을 갖었던지간에 일터에서 억울하거나 서러운 일은 없어야 한다. 합법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임금을 받는데 서비스직이라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