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베라는 남자>와 골목 민주주의

책익는 내숲길

by 김 준 호

요즘, 내숲길 골목길을 걷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이름은 ‘오베’. 스웨덴 영화 속 인물인데, 어쩐지 우리 동네 세탁소 아저씨와도 닮았고, 골목 어귀에서 주차로 다툼하던 어느 어르신의 뒷모습 같기도 하다. 영화 《오베라는 남자》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늘 불만에 찬 얼굴로 이웃들의 허술한 행동을 지적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골목을 순찰하듯 걷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몇 번이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다, 번번이 이웃들의 참견 때문에 실패한다. 누군가는 그를 ‘꼰대’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안에서 오히려 ‘동네를 지키는 사람’의 진심을 본다.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우리 골목의 풍경이 겹쳐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은평 신사2동 내숲길에는 비슷한 결이 있는 이웃들이 있다. 눈이 오는 날엔 자기 집 앞 눈을 조용히 치우고, 쓰레기봉투가 넘치지 않도록 돌보는 사람들, 주차 질서를 위해 소리 없이 애쓰는 사람 등 이 모든 행동들은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묵묵히 이어지는 동네의 ‘생활 규칙’이다. 작은 실천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질서와 배려. 나는 이것을 ‘골목의 민주주의’라 부르고 싶다.


1.png


오베는 영화 속에서 그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지키는 인물이다. 거주자 전용 구역엔 외부 차량이 들어와선 안 되고, 공동 물품은 정해진 기한 안에 반드시 반납해야 하며, 길가에 개인 물건을 함부로 두어선 안 된다. 그의 고집은 때때로 주변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원칙 하나하나가 사실은 동네를 지켜내는 뼈대가 된다. 공동체가 무너진 도시의 어딘가에서, 오베는 사라지지 않은 질서의 마지막 수호자처럼 보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동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우리 삶에 가장 가까운 정치는 대개 가장 작고 소박한 공간에서 시작된다. 누구나 관심을 두는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보다, 오히려 투표율이 낮은 지방선거나 주민자치회 활동이 우리 삶에 더 깊게 연결되어 있다. 동네의 공원, 골목길의 정비, 마을버스의 노선조차도 결국 주민 스스로의 참여로 결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산다. 그래서일까, 선관위에서도 한때 '동네 민주주의' 활성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우리동네 공약지도’ 같은 활동은 주민이 직접 공약을 제안하고 정책을 만들어가는 실험이었다. 정치 효능감을 높이고, 참여의 물꼬를 트기 위한 시도였다.


내숲길에서 내가 보고 겪은 많은 프로젝트들도 결국은 이러한 ‘작은 민주주의’의 움직임이었다. 골목에서 들어선 카페가 그림 전시회를 열고, 마을 문집을 내고, 오래된 대문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도 그 골목에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설령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정치다. 이웃이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 방향을 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믿는 민주주의의 가장 따뜻한 형태였다.


영화 속 오베는 결국 삶을 다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그의 고집스러운 원칙을 알아주고, 필요할 때 말을 건네준 이웃들 덕분이다. 그는 그 동네에서 버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이웃이었고, 어느 어린아이에겐 ‘함께 눈을 치우는 할아버지’였다. 오베가 살아 있는 한, 그의 골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였다.


지금도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 내숲길에도 오베 같은 사람이 있었을까? 혹은 내가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 동네의 작은 규칙을 지키고, 이웃들의 불편을 먼저 알아채고, 골목이 품고 있는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사람. 삶이란, 그런 작은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 아닐까.


불광천을 따라 걸으며, 나는 오베를 생각한다. 북유럽의 낯선 이름을 가진 한 중년 남자. 하지만 내 골목 어귀에서도, 언젠가는 나도 그런 오베가 되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렇게 오늘도, 골목은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골목을 지켜낸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9화골목에서 만난 재건축의 명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