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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베개에 남은 마음

by 담은

“너 베개는 왜 맨날 누렇게 돼 있냐?”
엄마는 내 베개피를 벗기며 핀잔 섞인투로 말했다.

내 베개는 늘 누런색이었다.
어릴 때 매일 밤 울다가 잠들었으니,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초등학생 때였는데도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매일 우니까 색이 변하는 건 당연하지.’
그 말을 속으로만 꿀꺽 삼켰다.
내가 삼킨 건 슬픔이 아니라,
내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이었다.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릴까 봐 걱정됐고,
엄마 마음이 더 무거워질까 봐 미안했다.
그래서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내 감정은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슬프고 괴롭다고 말하면

엄마가 더 슬프고 괴로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와 본 적 없는 문장들은
내 몸 어딘가에 눌러 담겼었나 보다.

그 문장들은 내 몸 여기저기에 눌어붙어
어떤 날은 숨쉬기가 어렵게 하고,
어떤 날은 괜히 등허리를 아프게 하고,
또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는데도
속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도 나의 감정들을 모른 척 조용히 지나쳤다.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인사하고,
기꺼이 웃는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속은 찢긴 마음에 아파도
겉은 늘 조용했다.
나는 그게 내가 사랑받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스무 살 무렵, 지인 언니가 말했다.
“너는 눈이 촉촉해 보여서 예쁘다.”

언니의 말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내 눈이 촉촉했던 건,
늘 울음을 삼키며 다녔기 때문이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
그렁그렁한 채로 살았다.
그럼에도 나는,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우울을
누군가에게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 감정을 숨기고, 또 모른 척해야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감정을 말하면
그 말은 칼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감정을 말한다는 건
언제나 어떤 잘못처럼 느껴졌다.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늘 울고 싶었다.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슬픈 나를 안아달라고,
두려운 나를 도와달라고.
그런데 나는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피느라
내 마음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척했다.

어쩌면 그건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받지 못할까 봐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감정은 쌓이면 곪는다.

그러나 말하지 못한 마음은
내 안에서 뾰족하게 자라나
어느 날부터
스스로를 찌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찔리고,
찢기고,
너덜너덜해졌을 때,
그제야 알게 됐다.

가장 나를 아프게 한 건, 바로 나였다는 걸.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감정을 말하는 연습.

“그건 나를 슬프게 해.”
“그렇게 말하면, 난 무서워.”

이 짧은 문장 하나 꺼내는 데도

아직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말하지 않은 감정들이
칼이 되어 나를 찌른다는 걸.

이제는 나를 모른 척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끔은 돌아보고,
가끔은 잠시 멈춰 서라도
내 마음 앞에 서보려 한다.
내가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나는 조용히 서툴게,
작은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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