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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Dec 31. 2023

외할머니 고무신

이번 달에만 벌써 눈과 관련된 글을 두 편이나 써서 더 이상 눈 내리는 일화에 대해서 쓰지 않으려 했건만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유달리 잦은 눈이 내렸다 싶은 12월이었는데 이 눈 오는 날과 관련된 일화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을 꼭 오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12월 30일이었던 어제 수도권을 포함한 중부지방에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두 세시 경까지 장장 대여섯 시간을 일생에 본 적 없을 만큼 굵은 눈방울과 자잘한 눈열매가 순간순간 자리를 빼앗으며 휘황찬란하게 내렸다.


한반도 서쪽에 위치한 우리 외가댁은 눈이 한 번 왔다 하면 서울에서 내리는 폭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게 오는데, 30cm 이상 쌓이는 데다 눈이 오는 날도 잦아서 쌓인 위에 또 쌓이는 일도 있곤 한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소싯적 길가에 어른 허리까지 오는 나무들이 잠길 만큼 눈이 온 적도 있다고 했으며, 허벅지까지 눈이 쌓이는 날이 가마솥에 누룽지를 긁어먹는 날만큼이나 자주 있었다고 하셨다. '어른 허리까지'라는 높이는 실로 잘 믿어지지는 않으나 그만큼 눈이 많이 내렸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하튼 발이 푹푹 들어갈 만큼 눈이 내린 날은 하얀 눈밭에 푹석 누워도 눈이 쿠션처럼 받쳐주어 다치지 않을 정도라니 많이 오긴 왔나 보다.


외할머니 댁은 일제강점기 이전에 지어졌으며 흙벽에 지붕은 지푸라기를 엮어 덧댄 오두막과 흡사했다. 방 문은 나무를 깎아 격자 모양으로 이어 붙이고 한쪽 면에 창호지를 붙여 집안으로 통하는 찬 바람을 간신히 막고 있고, 동그란 쇠를 문에 달아 열고 닫는 기능만 간신히 하는 아주 약하디 약한 문이었다. 마치 사극에 나오는 신방 차린 첫 날밤을 엿보기 위해 밖에 있는 얼간이들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대고 있으면 침 묻은 습기로 문에 구멍이 펑 뚫리는 그런 문 말이다. 바람을 막아주기는커녕 문과 문틀 사이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은 방 안의 열기를 바깥으로 가져가는 것 같았다.


방 바로 앞 나무로 된 마루는 나무 기둥을 받쳐 그 밑은 빈 공간이었으니, 집에서 기르는 개들 대여섯 마리가 그곳에 새끼를 낳는 용도로 쓰곤 했다. 여름이면 땅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공기가 에어컨 역할을 해주고 다른 짐승들로부터 숨을 수 있는 벙커 역할도 해주다 보니 좁고 어두운 공간이 개들에게는 제 집처럼 여겨진 모양이다. 7세 때 내 키에 3분의 2까지 오는 높이였으니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히 통과해야 하는 나무마루는 신발을 벗고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해서 들어갔다.


물은 마당 한편에 있는 우물에서 길어 올리고 부엌에는 두 개의 가마솥과 아궁이가 나란히 붙어 있으며 쌀과 말린 곡식 등 식량은 광이라고 하는 곳에 보관했다. 그야말로 박물관이나 민속촌에 재현해 놓은 전통 가옥 풍경을 나는 어린 시절에 실물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비 오는 날 물 피하고, 눈 오는 날 눈 피하고, 산짐승과 들귀신으로부터 간신히 몸을 숨기기만 할 수 있었던 허름하고 초라한 가옥에서 할머니는 일제 순사들에게 놋그릇과 수저를 빼앗기고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자식들 먹일 식량을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공수해 오며 한국전쟁을 겪은 지독한 가난 속에 2남 4녀를 키워내셨다. 친지 중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 자식의 숫자가 이보다 더 많았다는 말도 있으나, 못 먹고 못살던 시절 이야기다 보니 그 비극의 역사를 누구도 떠올리거나 입 밖에 꺼내고 싶어 하지 않아 자세히는 알지를 못한다.


한평생 그렇게 살다 가신 할머니에게도 자식들만큼은 객지로 내보내고 싶은 꿈이 있으셨는지(어쩌면 가난 때문에 집을 떠났을는지도 모른다.) 장성한 자녀들은 하나둘 씩 배우자를 데리고 고향집에 방문했다.

그중 이모 한 명은 결혼한 남편이 전기 기술자인데, 갖고 있는 기술이 꽤 괜찮아서 일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는 어엿한 사업체 하나를 운영 중이었다.


자신의 배우자가 살던 집을 보러 내려온 이모부는 여전히 어렵게 사시는 장모님이 마음이 쓰였는지 가장 먼저 집에 해준 일이 아궁이를 없애고 전기보일러를 놔준 일이었다. 방에 판자 같은 것을 깔고 보일러 스위치를 켜고 온도를 맞추면 바닥이 뜨끈해지는 시설인데, 도시가스가 들어가지 않는 농촌지역에서 휘발유를 사러 갈 필요가 없는 편리한 시스템이었다. 할머니는 연로하시고 지독한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으셨기 때문에 기름을 채우는 번거로운 일을 몸소 하실 수는 없으셨다.


할머니는 사위가 놓아준 전기보일러를 사용하시면서 아픈 무릎도 지질 수 있고 꽤나 만족한 생활을 하시는 것 같았다. 다만 정성으로 놓아준 이 전기 기기가 우리가 흔히 아는 보일러와 다르게 하나의 단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작동을 시키면 얼음장처럼 차갑던 방바닥이 재빠르게 고온에 도달하는 건 매우 잘했으나, 엉덩이가 뜨거워 이불을 두 겹 세 겹을 깔고도 이리저리 굴러가며 덜 뜨거운 곳을 찾아야 할 정도로 적절 온도로 낮춰주는 데는 영 잼병이었다. 거의 켜고 끄는 기능만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공지능적인 감각은 탑재를 못한 것이다.


외할머니 댁에서 겨울날 밤 하루를 보낸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할머니를 마주치고는 바닥이 뜨거워서 한 번은 왼쪽 허리를 대다가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가 엉덩이만 붙이고 허리는 들었다가 이리저리 구르며 잠을 잤다고 투덜거렸다.


보일러의 이런 현상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터인 할머니는 내 얘기를 듣고 보일러 스위치가 있는 벽 쪽으로 가시더니 전날 밤 뜨거움에 방점을 찍는 한 마디를 보일러에게 내뱉으셨다.

보일러 전원 스위치를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리시며 "스벌놈의 새키, 이 놈의 스키기가 이 ㅆ넘의 스키가 왜 그러냐 응? 왜 왜" 이런 말을 연신 하시고 계셨다. 보일러 스위치를 향해 욕을 하면 보일러를 향해 욕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생각이신지 보고 있자니 눈가에 촉촉한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지어졌다. 보일러 스위치 녀석에게 쏟아부은 상스러운 욕은 1분가량 지속되었는데 할머니의 손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과 집에 찾아온 자식들을 따뜻하게 지내게 해주고 싶은 노인양반의 지극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온 가족이 함께 외가댁을 방문하여 하룻밤 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는데, 예순 살을 넘기신 할머니는 아까 말한 그 나무 마루까지 쫓아 나오시며 "나 죽기 전에 한 번만 더와."라고 말하셨다.

경제발달의 기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흙밭 가득했던 농촌 지역에 고속도로가 뚫리고 KTX가 오고 가는 시대가 오자 자동차를 이용해 반나절이면 갈 수 있게 되면서 그 후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을 더 할머니를 뵈러 갔다.


손주들이 내려오면 할머닌 키우는 닭을 잡아 저녁 상 위에 올리셨고, 복분자를 따서 떡을 해다 주셨으며, 조롱박이며 지역 특산물이며 서울에서 좀체 볼 수 없는 물건들을 보며 신기해하면 아낌없이 다 가져가라고 하셨다. 아버지께 미안한 말이지만 명절 때마다 손자손녀가 버글버글 내려오는 친가 조부모 댁에 비하면 정성과 사랑이 차고 넘치는 외가댁 가는 날이 더 기다려졌다. 어쩌다 한 번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도 볼 때마다 손을 잡고 쓰다듬고 예쁘고 기특해 어쩔 줄 모르는 외할머니에 비해, 여자 손녀들은 시집가버리면 끝이라며 대를 잇고 조상 모실 남자 손자만 챙기던 친가는 그다지 가고 싶은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유교사상 때문에 매 명절마다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몇 번 뵙지 못했던 외할머니는 춥고 긴 겨울을 93해 보내시고 태양이 북반구에 가장 가깝게 다가와 땅속 미물마저 태워버릴 듯 이글거리는 폭염으로 펄펄 끓는 어느 날, 한없이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세상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나셨다. 창호지 하나로 바람을 막아야 했던 지독히도 가난한 삶을 사신 할머니는 형편이 좋아진 후에도 오두막집을 떠나지 않으셨고 생을 다하실 때까지 그 집을 남겨두셨다. 몇 번에 걸친 리모델링으로 지푸라기 지붕을 벗겨내고 기왓장이 깔리고 창호지 문은 샤시로 바뀌었지만 집의 기둥이 되는 흙벽과 나무로 된 필로티식 마루는 그대로였다. 좀 더 좋은 곳에서 살다 가셨으면 좋으려면 그곳이 생활 터전이셨던 할머니는 생의 끄트머리까지 그곳을 저버리지 않으셨다.


우리와 영원히 작별하신 날 할머니의 채취가 남아있을 듯한 오두막을 마지막으로 보자며 흙벽에 나무마루집을 다시 방문했다. 한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녹아내릴 듯한 햇볕이 직사광선으로 머리 위를 쏘아대던 날이었다. 아직까지 근간은 나무와 흙의 기능이 남아있는 오두막이라 어딘가에 엉덩이라도 대고 앉으면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 마루는 여전히 건재했고 마루 밑 빈 공간이 제공한 개들의 낙원에는 더 이상 새끼 한 마리 어미 한 마리 남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대신 마루 아래에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신으셨는지 알 수 없는 초등학생 발보다도 작은 사이즈인 225mm 크기의 아담한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남편 없이 홀로 자식들을 키워내기 위해 논으로 밭으로 일을 나가실 때도 행여나 얼어 죽을까 아궁이에 불을 지피실 때도 쉼 없이 닳도록 신던 고무신을 매번 고치고 교체해 가며 신으셨다. 한평생 신고 다니신 마지막 고무신은 약간의 흙이 묻어 있긴 했으나 하얀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고 어딘가 해진 곳은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마지막 신으신 신발은 상태가 양호하다는 게.


함박눈이 펑펑 내린 2023년 연말 마지막 글은 내리는 눈을 보며 먹고 즐기는 원색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로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눈은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지 적어본다.



할머니. 잘 계신가요? 거기는 춥지 않죠? 아무 걱정 없이 편안히 지내시길 빕니다. 할머니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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