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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던 연애에서 버려진 연애로

그녀의 23세

by 실버반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잡아야 진짜 연애 실력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떠나지 않는다. 노력할 필요도 없고 관계를 잘 형성해 가기 위해 진중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이 이끌어가는 대로 따라만 가도 상대방은 나에게 충성을 다한다.


세상에 찌들지 않은 시절 정신과 육체가 푸릇푸릇할 때 햇살 비치는 봄날 좋아하는 이성과 함께 걷는 길.


이제 막 엔딩씬을 마친 영화의 스태프 자막 올라가는 여운을 남기고 손잡고 극장에서 나와 함께 나누는 영화 감상 대화.


팥빙수 하나 사이에 두고 한 입씩 떠먹으며 눈 마주치고 까르르 웃는 둘 만의 시간.


이런 아름다운 기억이 20대 초반 나이에 쌓여 있다면 훗날 중년이 되어서도 그 시절이 아름답게 기억되었을 것이다.


한데 다섯 살 연상 만학도와의 시간은

'만나면 놀리고 싸우고 집에 감'이라는 지긋지긋한 공식을 모범생마냥 대입한 나머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시기에도 저런 추억 냄새 물씬 풍기는 기억 한 자락이 없다.


1년을 넘게 만나면서도 기억 속 어느 한 부분 화창한 날이 자리 잡고 있질 않았다니.

그 시절 얼마나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는지 후회스러웠다.



연속 두 번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연애 후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세 번째 만난 연애 상대이자 내 기억 속 획을 그은 자이가르닉 효과 같은 미완성 아쉬움 대작을 남긴, 남자들로치면 잊지 못할 첫사랑과 같은 그가 내게 나타난다.


그는 내게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낸 첫 번째 남자였다.


설레는 썸으로 시작한 솜사탕처럼 달콤한 감정이 순식간에 드럼통에 불을 붙인 것처럼 활활 타올랐. 그를 향한 내 감정은 그와 완전히 종결되는 날에도 진압이 안되고 잡을 수 없이 화마를 뻗어갔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만났던 두 번의 연애를 통해 배운 게 없다 보니 진정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랑을 잡지 못했다. 그가 보여준 연애 수준을 따라가기에 내 실력이 훨씬 못 미쳤다.


그는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는데 서른 넘기 전에 결혼하려고 사활을 걸었는지 어쨌는지,


자기가 꿈꾸는 결혼 생활 조건 몇 가지에 부합하는지만 빠르게 확인하고 아니다 싶으니 대차게 나를 차버렸다.


그리고 정확히 나와 사귄지 1년째 되는 날, 헤어진지 6개월 만에 다른 여자 손을 잡고 결혼식을 했다.


그는 교제하기 전 나와 이미 3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두근거리는 이성을 향한 감정이 싸트기 전에 아는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낸 터라 생판 모르는 남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급하게 찾아온 호감은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이끌림보다 더욱 빨랐고 끝을 모르고 분출해 갔다.


그는 원하는 조건이 있음에도 생물학적 활동을 통한 2세 조성을 위해서는 성적인 이끌림도 필요했는지 중매가 아닌 연애로 여자를 찾았다.




썸의 출발은 아주 사소했다.


어느 날 그와 내가 포함된 무리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나갔다. 한 달 전쯤 파마와 염색을 같이 하면서 내 기다란 생머리는 여성스러운 웨이브 헤어로 변신해 있는 상태였다.


이제껏 스무 살 남짓한 여자애로 보던 눈이

구불 거리는 웨이브 파마를 보는 순간 여성으로 보이게 되었는지 그는 그때부터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 그와 나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


나는 영화 보고 밥 먹는 데이트까지만 할 줄 알던 풋내기였고,

그는 이성과 어디까지 해보고 얼마만큼 알아야 제대로 된 교제인 줄 아는 경험이 풍부한(?) 남자였다.


배우자감을 찾고 있는 남자와 사랑받고 싶어 연애하는 여자.

누가 더 객관적으로 상대를 탐색하겠는가.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상호작용이었다.




이성을 접해보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사춘기와 20대 때 호감 가는 사람만 봐도 심장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빨개지던 뜨거운 연애 감정이 생기질 않는다.


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그토록 사랑했던 그를 만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설령 그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한다는 보장이 없더라도 만나던 그 순간 그 시간만큼은 당시보다 훌륭하게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희미해지고 아무리 멋진 상대를 봐도 감성보다 머리를 굴리는 일이 많아지면서 어릴 적 뜨거웠던 감정이 그리워지게 된다.

그토록 사랑했던 그와 그녀와 연애를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게 마음속 가득한 첫사랑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을 못 잊는다기보다 모든 걸 통달하게 된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귤 까먹는 일보다 쉬운 게 당시 연애였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제대로 사랑해보지 못하고 끝났던 결말 아쉬움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순수한 시절 만나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그저 만나는 것 만으로 기뻤고, 몹시도 냉정하게 대해도 언제까지라도 함께 할 거라 상상했던 그 사람.


연달아 두 번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던 때에는 도도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게 대해놓고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자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던 어찌 보면 반성해야 될 얘기다.


이번 이야기는 처음이 아니라 끝부터 시작한다.


생애 처음으로 두뇌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그가 나를 차버린 순간 부터다.


만남 기간보다 길었던 이별 후 상처.

그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MRI를 찍는다면 뇌 어딘가 자상을 입혔을 것 같다.


오직 그 나이였기에 가능했던

일생일대 그렇게 전두엽이 마비된 듯 바보 같은 사랑을 했던

그 사람에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쏜살 같이 차여버렸던 이야기를 이제부터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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