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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남자에게 대차게 차이다.

그녀의 23세

by 실버반지

겨울 계절 학기만 끝나면 매일 만나서 같이 있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는 나를 향한 온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는 중이었다.


하루 한 번 적어도 이틀 한 번이라도 연락하던 그가 거의 일주일째 연락이 없다. 한 번은 내가 전화했는데도 받질 않는다. 무슨 일 생겼나? 조카가 크게 아프거나 혹시 죽었나? 이유가 있겠지... 답답한 마음을 다스리며 기다리던 중 오래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내게 저녁때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평일 저녁이면 항상 영어 학원에 있는 걸 뻔히 알 텐데 왜 묻는지 의아했다. 학원에 있을 거라고 말하자 끝나면 몇 시쯤 되냐고 물었다.


하루 이틀 다닌 게 아닌데 내 스케줄을 잊었나, 이상했다. 은 안개가 낀 것 같은 호함을 애써 표현하지 않고 시간을 말했다. 그는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원 앞으로 가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날 반가움에 들떠 추운 겨울 그가 내게 준 줄무늬 폴로 남방에 폴라티를 받쳐 입고 코트 하나 걸치고 학원으로 향했다.

그를 만날 기대감에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수업 도중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학원 인근 어느 카페에 있으니 그쪽으로 오라는 내용을 확인했다. 문득 좀 이상했다.


벌써 세 번째 이상함을 느낀 지점인데 이때까지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학원으로 올 때면 언제나 차를 몰고 거의 학원 문 앞까지 왔었고, 내가 어느 문으로 나오는지 정확히 알고 나를 픽업했다. 그런데 그날은 학원에서 한참 걸어 나와야 하는 곳에 위치한 둘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커피숍에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받는 연애만 하다 보니 이번에도 나를 보러 오는 줄만 알았다.


시간이 늦어 딱히 뭘 할지 정하진 않았어도 카페 같은 곳에 앉아 이야기라도 하겠지.

눈치라고는 일곱 살 어린아이 수준에도 못 미쳤다.


그렇게 그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탁자 위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아 쥔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그의 포개진 엄지 손가락을 내 손으로 만지며 한동안 그리웠던 그의 촉감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걱정하고 조바심 내며 기다렸던 것이 무색하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일이 좀 있었어."


표정은 굳어 있었고 시선은 종종 사선 아래 탁자 모서리 쪽을 향했다. 만날 때마다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싸늘한 느낌에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던 내 손을 얼른 내 쪽으로 끌어왔다. 온기가 느껴지던 그의 손은 내가 만져서는 안 될 물체 같았다.


그는 나를 대할 때 예전 같은 느낌이 없다고 말했다.


나를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말을 쉬지 않고 덧붙였다. 그 해 여름방학 그가 나를 두고 절친과 호주 여행을 한 달 동안 다녀왔는데 그때도 이런 마음이 들려고 해서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당시 여행하는 동안 생각해 보니 나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고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후회가 들어 이후 만남을 이어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며칠 혼자 지내며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나는 그가 동굴에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기다려주려고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떠나가는 남자는 무슨 수를 써도 잡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여지를 주고 있었다.


그는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 질문이 진심으로 나와 함께 답을 찾고 싶어 상의를 하고자 물어본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럼 뭐.. 만나지 못할 거 같다는 말 비슷하게 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하자는 건 안 했던 게 없었기에 그 상황에서도 내 감정과 전혀 반대로 그의 말에 수긍하는 대답을 했다. 그는 예전처럼 친한 사이로 지내겠느냐고 물었다. 나와 사귀기 전 4년 가까이 오빠 동생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었기에 그때처럼 돌아자는 말이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순간 내가 입고 있는 줄무늬 남방이 보였다.

그는 내게 이별을 고하려고 나왔는데 나는 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그의 마음은 나를 떠났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남방을 벗으며 그에게 돌려주려는 행동을 취하며 말했다.


"마침 잘 입고 왔네."


그는 그동안 날 버릴 궁리만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그를 향한 내 마음은 더 깊어져만 갔던걸 들킨 것 같았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정말로 옷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는 미소인지 조소인지 쓴웃음을 지으며 아니라고 말하고 다시 입으라고 했다.


그가 하자는 건 안 한적 없으니 한쪽 팔은 입고 있는 채로 한쪽 팔 벗는 동작을 하다가 황급히 다시 입었다. 그렇게 내 옷이 된 Y2K 패션의 대명사 흰 줄무늬 파란색 폴로 남방은 이후 손을 덜덜 떨며 쓰레기통에 내 손으로 처넣게 된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자기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한 그는 곧바로 나가자고 했다. 너무 떨려 잡아야 하는지 이대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냥 그가 가자는 대로 따라 나왔다.


2층에 위치한 그와 그날 처음 가본 커피숍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다리가 덜덜 떨리는 걸 그가 볼까 애써 감췄다.


지하철역까지 걸어오면서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좋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이대로 가도 되는지 어쩌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지하철은 그의 방향과 나의 방향이 정확히 반대로 향한다. 그와 내가 앞으로 가게 될 길이 10여분 전에 갈라져버린 것처럼 말이다.


항상 나의 집까지 그의 차로 먼저 바래다주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기에 학원 앞 지하철 역까지 같이 걸어온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하철 계단을 같이 오르며 너무도 그를 잡고 싶었다. 이 계단만 올라가면 끝인데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계속 만나달라고 나 아직도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홀가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10여 분 전 커피숍에 도착했을 때 봤던 답답해 보이던 얼굴과 달리, 모든 말을 다 하고 모든 상황을 종결시킨 시점 그의 모습은 무척 편안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나에게 그걸 말하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철 승강장을 향해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떨리는 눈으로 그의 머리부터 따라가 보았다.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던 그의 뒷모습이다.

다시는 못 볼 모습이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대볼 수 없는 남의 뒷모습이었다.


얼마나 경쾌하고 빠르게 내려가는지 등부분쯤 보이자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나를 떠나는 속도와 반비례로 나는 온몸이 춥고 떨리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하철을 타려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지하철 타는 건 포기하고 간신히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길과 바깥 출구로 나가는 교차 지점에서 그는 내게 안녕이라고 했다. 나도 안녕이라고 말하며 낮게 손을 흔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외에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연인이었던 그와 내가

알고 지내는 오빠 동생 사이보다도 못한 관계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더 큰 불지옥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한 채 그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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