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23세
네가 그 여자를 소개받고 있을 때
나는 새우처럼 다리를 구부리고 모로 누워 널 그리워 하며 울고 있었고
네가 그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했을 즈음
나는 너와의 재회를 상상했었고
네가 화려한 스튜디오 안에서 웨딩 사진 찍고 있을 때
나는 벚꽃 피면 같이 오자고 한 그 장소에서 우울한 얼굴로 사진기 앞에 서있었다.
네가 모든 결혼 준비를 마칠 무렵
나는 너를 만나지 못하는 슬픔에 강의 시간에도 눈물이 흘러내렸고
네가 결혼한다는 말을 지인으로부터 정확하게 들었던 날
나는 다리가 덜덜 떨려 어느 지하철역 승강장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네가 예식장 런웨이를 힘차게 걸어가는 날
나는 몰래 숨어 너의 결혼식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고 당치도 않은 바람을 했고
네가 그 여자와 같이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여전히 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홀로 여행을 떠났다.
내가 졸업 유예로 한 학기 연장 신청할 때
너는 임신한 그녀의 축하를 받으며 졸업했고,
그렇게 너는 나와 헤어진 날로부터 정확히 6개월 만에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곧바로 연달아 두 명의 아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까지도 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마치 만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잊은 채 너는 너의 야망을 채워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네가 나를 만나면서 결혼하고 싶어 했어도,
내가 그 감정을 끝까지 이끌어주지 못했다 해도
그걸 감안한다 해도
너는 나에게 잔인했다.
예전처럼 친한 사이로 돌아가자고 했던 너는
그런 관계로도 절대로 돌아갈 수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혹시나 다시 오빠 동생 관계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미련이 정말로 미련한 생각이었음을 입증해 주었고,
오빠 동생 사이었다면 하객으로 갔었을지 모를 너의 결혼식 날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임에도 눈물을 펑펑 흘렸다.
뜨거운 햇살이 차창을 뚫고 들어올 듯 강렬한 빛을 내뿜던 그 해 여름 날.
너와 함께하는 시간에 내 기분은 상쾌했고
옆자리엔 나를, 뒷 자리엔 친구를
네가 사랑하는 사람만 골라 태운 네 차 안에서
너의 마음도 꽤나 흥에 겨웠겠구나.
근데 어쩌니.
어쩌다가 들어버린 뒷 좌석에 앉은 너의 친구로부터 우연히 나온 그녀 얘기를.
네가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시점이 나와 헤어지기 전인지 후인지 나는 모르겠다. 중요하지도 않다.
생판 모르던 여자를 소개 받은 게 아니라
나를 만나던 동안에도 네 주변에 있던 여자였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라게 해주었구나.
실제로 그랬다.
어느 날 그의 친구로부터 들은 어떤 여자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당시 얘기 속에 나왔던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가 나에 대해 '이 여자는 아닌 것 같다'라는 인식을 확고히 한 후 철저한 자기 준비 과정을 거쳐 후회 없이 내팽개쳐 버린 후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을 소개 받은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여자로 갈아 탔다.
나를 만날 때 함께 백화점에 가면 옷이나 신발 등 의류 잡화 같은 걸 보는 게 아니라, 생활 가전, 가구 같은 걸 유심히 보던 그였다.
공원 같은데서 아이가 지나가면 아이 소유의 보행 보조 탈 것이나 장난감 같은 걸 뚫어지게 보면서 좋은 거니 나쁜 거니 품평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20대 나이 남자에게서 보기 드문 관심사였다.
시기상 환승 연애에 가까운 그의 초이스가 주변에 존재 하던 여자라는 사실에 놀라웠고,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결혼에서 두 아이 출산까지 달성해버렸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솔직히 참... 한 사람씩 맛 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뭔가 싶다.)
연애에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 결혼으로 직행하던 그의 행실을 보면, 머릿 속이 얼마나 결혼 생각으로 꽉 차 있었는지를 반증해주는 것 같았다.
<여자에게 마음이 다 떨어져 나간 남자>
겨울 방학이 끝나기 전 그와 내가 포함되어 있는 모임에 한 아이가 군대에서 휴가 나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커피숍에서 충격을 받고 이별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이별 후 한동안 메신저 로그인 상태여도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휴가 나오는 애를 꽤나 예뻐하는 동생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도 보러 나올 가능성이 있고
나도 나가서 함께 있고 싶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예상은 다르지 않았고 그 자리에 나도 나갔고 그도 나왔다.
그를 보고 예전처럼 안고 싶고 손도 잡고 싶었지만 가끔씩 마주치는 그의 눈빛과 표정은 전 같지 않았다.
정말 아무 느낌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명백히 휴가 나온 동생을 만나러 온 것이다.
당시 향후 결혼하게 될 그녀를 만나고 있었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6개월 후 그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시기적으로 학교 생활에 결혼 준비를 병행하려면 당시에도 만나고 있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해 본다.
욕 나오면서도 무너져 내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빛의 속도로 잊은 건 부정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 보고 있던 그는 나와의 동석이 불편하고 오래 있기 싫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그였다.
대조적으로 뱃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내 감정은 그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바랐고 그의 옆에 앉고 싶었다.
그러나 갈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것 같았고 나만 골라서 밀어내는 듯한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 떠난 남자가 전 여자 친구를 대할 때 이렇게 무섭게 변하는구나.
내색하지 않고 그를 대하려 했지만 내 눈은 슬쩍슬쩍 그를 향했다. 본능을 숨기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럴수록 내 행동은 오버스러웠다.
괜스레 큰 소리로 웃어댔고
길을 걸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가 걸었고
목소리는 평소 나오지도 않는 하이톤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꾹꾹 눌러 담은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감정을 티 내지 않으면서 그의 주의를 끌고 싶은 마음에 더욱더 과장되고 어색하게 행동했다.
어떤 행동을 하던
어떤 목소리를 내던
그의 이목을 끌어낼 수 없었다.
일부러 확고한 행동을 애써 해내고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시야 안에는 내가 들어오지 않았다.
무리 속에 아무런 관련 없는 이방인이 끼어 있다면
그에겐 그게 나였을 것이다.
연인 시절 그는 나와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했었다.
하우스오브데드를 즐겨하던 내 취향에 맞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오락실 시뮬레이션 게임을 '그는 몇 번 해준 적'이 있다.
같은 게임을 하고 있으면 나와 함께한 시간이 떠오를까.
그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나 아직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속마음을 더욱 과장된 행동으로 숨겨야만 했다. 무감각하다 못해 싸늘한 그의 표정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아이들과 오버스럽게 게임을 하는 척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말도 못 붙이고
그렇다고 사람들과 노는데 푹 빠진 것도 아닌 불편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그는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게 그의 실물을 본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