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폭력 트라우마가 연애에 미친 악영향

그녀의 23세 - 나를 차버린 이유

by 실버반지

《※폭력적인 내용 주의》




앞서 말했듯이 그에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다는 몇 가지 구상이 있었다.

나쁜 것들은 아니었고 대한민국 일반적인 청년이 지닐 수 있는 무난하고 대개는 수긍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그의 죽마고우들과 놀러도 가고 술자리도 갖고 좋은 일 슬픈 일 기쁜 일 함께 나누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있었다.


그 관계 속에 멤버 각자의 배우자와 함께 하는 것도 모임 내에서 합의가 되었던 모양인지,

구성원들 중에는 남자들의 현재 여자친구, 아내, 예비신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오래도록 함께하는 부부동반 모임.


지극히 평범한 아주 건강하고 성숙한 인생 설계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광기로 전 국민이 하나가 되던 그 해 여름

코리아 팀은 4강 신화를 목전에 두고 연일 신기록을 경신해 가던 중이었다.


온 거리가 빨간 옷 입은 사람들로 물들었고

학교 앞 상점 디스플레이는 갖가지 붉은 아이템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어딜 가나 축구 얘기뿐이었고


한 게임씩 승전보를 울릴 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축하하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형님 아우 언니 동생이 되었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일생일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찬란한 순간에

그의 옛 친구들은 축구를 같이 보자는 제의를 해왔다.


몇 명의 친구들이 여자친구 또는 아내를 동반하고 나오는 자리에 그는 나도 동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 생각 없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수락했고

그게 이별로 한 걸음씩 다가가는 요인의 시작점이었다는 걸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알게 됐다.




최고의 순간

뜨거운 열기와 젊음이 불타오르는 그 해 6월

온 국민이 하나가 될 때


나는 누구와도 하나가 되지 못했다.


오랜 세월 감춰온

나의 내면을 누르는 학창 시절 끔찍한 기억이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에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게 만들었다는 걸

누구에게 말도 꺼내지 못하고

홀로 꾹꾹 눌러 담으며 살고 있었다.




초등학생이라는 어린애 딱지를 막 떼고 중학교에 갓 입학한 만 12세 나이에 겪은,

있을 수도 없는 아동 학대 경험이 내 인간관계 형성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무소불위 90년대 교사들은

심각한 폭력을 저질러도 무죄

학생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러도 무죄

뒷돈을 받아도 무죄.

돈을 안 가져오면 차별대우로 앙갚음하던 시대였다.

(전부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좋은 교사들도 있었다.)


그 아이 또한 입고 있는 옷 바깥으로 봉긋하게 솟아오르는 가슴이 수줍게 드러나기 시작한 2차 성징이 막 시작된 여아였다.


학교에 입학하고 겨우 2주가 지난 시점 일어난 사건이.




누군가 나에게 이게 핑계라고 말한다면,

정신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글쎄... 난 모르겠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굴러가는 나뭇잎만 봐도 깔깔대며 웃을 시기인 10대 소녀 시절에,

새 친구를 사귀고 오래된 친구와는 우정을 돈독하게 해 나가는 걸 배워야 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사회성을 키우고 친구들과 선생님, 부모님과 자녀의 관계를 배우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아가야 하는 사춘기 초입에


누가 그 사건을 기억할까 봐

내 얼굴을 보면 그때 맞았던 그 애라는 걸 알아챌까 봐


사람들 사이에 있기는 하나 누구도 나를 알아볼 수 없게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고 살게 됐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 들어간 게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내 눈을 가렸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


누구와 말할 때마다 그 사건을 언급할까 봐 조마조마했고,

그때 맞은 애가 누군지 물어볼까 두려웠다.


가해자는 떵떵거리며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대한민국 땅이지 않은가.


빰을 후려친 남자 체육교사는 담당 학급을 운영하며,

수업을 진행하며 건장한 체격에 걸맞은 풍채 좋은 걸음걸이로 학교를 활보하고,


나는 누가 볼 세라, 그 체육 교사와 마주치기라도 할까 심장이 덜덜 떨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다녔다.


체육 교사가 운동장 가운데 서있으면,

나는 트랙 바깥쪽으로 담벼락에 붙어 그림자처럼 하교했다.


한 번은 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들어가다 입구에서 체육 교사와 마주쳤다. 여리고 어린 작은 여아의 트라우마로 얼룩진 심장은 미친 듯이 맥박을 상승시켰고, 오한에 들린 듯 벌벌 떨었다.


친구들이 말을 걸고 친하게 지내려고 해도

개미 같은 작은 목소리로 단답형 말만 했고,

언제나 늘 그곳이 어디건 간에

그때 맞은 애라 기억할까 봐 숨만 죽이고 있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친구 사귀는 것에 큰 장해를 입었다.



이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했냐면


나는 그 사건이 있고 9년이 지나도록(23세가 된 시점),

아니 지금까지도

그때 맞은 충격의 강도와 내적 상처뿐만 아니라 교사의 이름과 날짜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를 차버린) 그 남자의 친구들을 처음 만난 날부터 이후 몇 차례 더 만나는 동안

나는 그들과 친해지기가 어려웠다.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친해지는지 정말 몰랐다.


중학교 입학한 3월 벌어졌던 그 사건 이후 친구를 전혀 사귀지 못한 탓에 누군가와 가까워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친구가 예쁜 머리핀을 꽂고 왔을 때 뭐라고 칭찬해줘야 하는지,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 큰 슬픔에 빠져 있는 아이에게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하는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마음속에 칼을 품은 사람 표정에서 무엇이 드러나는지

전혀 읽어내지 못했고 조금도 다가가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철저히 나를 숨겼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친구들을 만났을 때 내 포지션은 어떤 사람으로 위치시켜야 하며,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지,

그들이 내게 와야 하는지

판단이 불가능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현저하게 적었으니까.


'와~ 쟤는 여자 진짜 잘 만났다.'


이런 말 듣게 만드는 방법은 고사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평범하게 친해지고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방법조차 몰랐다. 그게 그 나이에 나였다.


어떻게든 고리를 끊어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현재까지도 나의 내면은 그 사건으로 야기된 상처를 받고 있는 걸 보면, 9년이라는 시간은 잊히기에 턱없이 짧았나 보다.


그게 나의 단점인 걸 알았다면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친구들 모임에 같이 나가자고 했을 때,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좋은 말로 잘 설명해서

시기를 조금 미룰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허나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일 뿐

그땐 그러지 못했다. 나도 나 자신을 몰랐으니까.




남자들의 결혼관은 대개가 평생을 두고 바뀌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에게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남자는 자신이 세운 결혼관이 어긋나게 될 것 같으면 여자를 바꿔 버리는 경우를 자주 봐왔다.


이게 나이가 들수록 외롭게 사시는 홀어머니를 신혼집에 모시고 와서 초창기부터 같이 살자거나,

효도는 셀프인 줄 모르고 결혼하면 부인에게 아픈 가족을 간호하며 살라고 하는 등 희한한 요건이 추가되기도 한다.


젊은 20대 청년이었던 그의 결혼관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빠른 시일 내 결혼과 출산을 하고 자신은 취업해서 일을 하고 아내는 육아를 맡아 아이들을 기르며,

친한 친구들로 구성된 가족 모임에 나가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나 보다.


그 그림에 한 자락을 내가 그려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자 그의 마음은 변질되어 갔다.

keyword
이전 08화만난 지 1년, 이별 후 6개월. 그의 결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