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23세 - 나의 관점에서 본 것
그도 분명 연애를 잘했던 시절이 있을 것이고 뭐가 뭔지 몰라 어눌하고 미숙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고, 잘 모른다고 말하고 그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가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하면 된다고 하나씩 알려주며 나를 만났을까.
아니면 이렇게 모르는 애와는 연애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깨끗이 접었을까.
과연 여섯 살이나 차이나는 그에게 더 진솔하게 내 모습을 보여주고 대화 나누며 만났더라면 만나는 기간을 더 늘렸을 수 있을까.
결혼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내게 했던 막말 퍼레이드 중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게 이거였다.
"여태까지 운전도 안 배우고 뭐 했냐."
여섯 살 차이라도 40살과 34살의 차이와
29살과 23살의 차이는 다를 것이다.
게다가 스물아홉 살 나이에 집에서 집과 차를 마련해 준 그는 결혼할 여자만 찾으면 되는 상태였다.
그에 반해 난 학교 다니며 공부만 해왔고 세상 경험이라곤 전무했다.
그가 내게 운전도 안 배우고 뭐 했냐는 말에 뜨겁게 연애해야 했던 여름방학 그가 홀연히 친구와 여행을 떠난 동안 나는 운전면허를 땄다. 그가 돌아왔을 때 내 운전면허를 보면 기뻐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스물세 살 여름방학을 운전면허 따는데 쏟아부었다. 나는 그를 염두에 두고 했지만, 그는 운전면허를 미리 따두면 자기 자신한테 좋은 거라며 운전 못한다고 나를 타박했던 건 생각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이 자식아 너는 운전병 출신이니까 그 나이에도 운전을 잘하는 거지. 나는 뭘 해본 게 있다고 차는 니 거더라도 능숙하게 운전을 하며 너 피곤할 때 너를 태우고 다닐 수 있겠냐."
라고.. 말이라도 통쾌하게 해봤어야 했는데...
생각은 그랬지만 돈 많은 어머니에 강남 8학군 지역에 둔 결혼 해서 살겠다는 신혼집, 20대 후반에 몰고 다니는 중형차를 내세우며 결혼할 여자를 찾는 그 앞에서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속 빈 강정 같았던 나는 그가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던 '강남 아파트'라는 곳에 가보고도 그런 걸 보고 듣고 판별할 줄 아는 눈이 없었다.
그가 자가용으로 아파트 앞까지 태우고 갔기 때문에 거기가 어디쯤인지 감이 안 잡혔다. 한강 이남 땅 값이 비싼 학군 좋은 동네라고만 짐작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지금 그때 그가 은연중에 자랑스러워하며 흘린 그의 출신 고교, 형제자매의 출신 학교, 집 주변 랜드마크 등 그가 말했던 걸 조합해서 추측해 보면
현재 반포한강공원이 내다보이는 신반포 인근 어디쯤으로 추정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그곳 아파트 가격은 몇 억대였다. 그보다도 더 20년 전에는 몇 천만 원 대였다. 그의 부모님은 그러니까 40여 년 전에 그것을 구매했다. 가만히 있어도 돈이 샘솟는 화수분 같은 그 아파트를 그에게 물려주려 한다.
그것이 그의 자신감이자 생애 모든 성공을 일찌감치 거머쥔, 사회에서건 연인 관계에서건 자신의 조건이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핵심이었다.
몇 억대 일 때도 그렇게 자랑해 댔는데
지금 그 땅은 평당 1억을 호가하고 향후에도 가파른 우상향을 예상하고 있는 지역이다.
(아마 지금은 그의 어깨가 더 올라갔을 것이다.)
그는 종잣돈 기반으로 돈이 돈을 벌어야 한다며 결혼해서 여자가 할 역할은 남편이 벌어온 돈을 굴려서 불리는 것이라고 입이 닳도록 경제 철학을 늘어놓곤 했다.
같이 사는 사이여도 조심해서 해야 할 말을 3개월 만난 여자에게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뿌리 깊은 자부심의 원천은 바로 그 아파트에 있었다.
그런 류의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여리고 바보 같은 나는 점점 자신을 잃었다. 그를 만나면 운전도, 돈 쓰는 것도, 요리도, 집안일이며 여행하는 것까지 다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될 것 같았다.
혼란스럽고 열등감으로 가득 찬 낮은 자존감은 그 앞에서 무언가를 하는 게 몹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나날이 위축되었고 그 앞에서 행동하는 게 자신감 없으며, 어리숙한 행동이 들킬까 봐 뭐 하나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끝내는 나를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일은 친구들과 관련된 일이었다.
관계지향적이고 친구들을 좋아하는 그에게는 그 해 어느 겨울날이 도저히 나를 용서할 수 없는 밤이었나 보다.
그의 죽마고우 모임에서 여자 멤버들은 제외하고 남자들만 만나기로 했었다. 특별한 날이면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 내가 좀 늦게까지 안 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일찌감치 안 가는 바람에 모임에 나가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소리 없는 분노를 공포스럽게 드러냈다.
공포스럽다는 말을 그냥 쓴 게 아니다.
친구들을 못 만나게 한 여자라는 분노 표출은 과히 엄청났다. 공개적인 공간에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물리적인 행위를 나에게 가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성)학대 였단 사실이 이제는 나를 분노케 한다.
그 일이 있고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차버렸다.
결국 여자를 버릴 거였으면 그런 학대 같은 행위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버리고 끝날 걸.
이 대목에서 '그 행위'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쓸 수 없어 우리 독자님들께 참 죄송하다. 궁금하실 것 같은데 정말 이걸 글로 쓴다면 논란을 일으킬 것 같아 쓸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게 뭐라고, 친구들 좀 만나게 놔두고 나도 일찍 귀가하면 되지 그걸 왜 비비적거리고 안 가고 있었는지. 나도 구차하고 그랬다는 사실 자체는 그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가 내게 했던 행동이 학대였는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나는 그런 쪽에 무지했으니까.
친구를 중요시 여기고, 친구와의 관계에 손상을 입힐 것 같은 여자는 처단해 버리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걸 내가 막을 순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좋았던 시력도 희미해지고, 관절이 약해지고, 날밤도 꼬박 새우던 체력이 고갈되고, 돌도 씹어 먹을 것 같던 기세도 유들유들해진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부드러워지게 마련이다.
그 겨울밤 나로 인해 그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진심으로 그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이제는 50살이 넘은 그의 연륜과 마인드가 건강하게 성장했길 바란다. 그랬다면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했어야 한다.
제 손으로 끝내버릴 관계였다면,
자존심을 땅에 떨어뜨릴 가학에 가까운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다.
그래야 그는 나이에 맞게 잘 발달한 것이다.
그런 것조차 무색하게 깡그리 다 잊어서 생각도 안 난다거나,
단 한 번도 돌이켜본 적이 없다거나,
여전히 그 여자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기도 그랬다고 정당화하고 있다면.
하. 그렇다면 내가 그와 헤어진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