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문제만 없어도 관계의 80퍼센트는 해결된다.
가만히 서 있는데 내 앞으로 돌풍이 훅 지나간 것 같다.
그가 하자는 건 다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처참히 나를 버릴 수가 있을까. 숱한 밤을 지새우며 그를 떠올렸고 아침에 눈 뜰 때마다 그가 보고 싶었다.
대체 언제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빨리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나도 너와 헤어지고 얼마 안 돼서 소개팅을 나가봤지만 너의 잔상이 너의 온기가 너와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라 집중이 안 됐는데.
새로 만나려는 사람과 힘겹게 이어 나가보려 해도 너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지 못한 내 마음에 다른 누구를 채워 넣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너는 대체 그걸 어떻게 뛰어 넘어섰을까.
너의 관점에서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기억에서 나는 완전히 지워진 거니.
시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그 짧은 찰나에.
결혼 준비가 다 된 남자들 중 짧은 기간 상대가 자신과 맞는지 안 맞는지만 파악하고 아니다 싶으면 메뚜기 뛰듯 또 다른 여자를 찾는 남자들이 있다.
이런 경우 만남 기간이 2~3개월을 넘기지 않는다. 연애 비슷한 것을 하긴 하지만 연애라고 볼 수가 없다.
결혼 상대를 찾고 있던 그가 어떻게 6개월이나 나를 만났을까. 이것을 고민하는 도중 아주 큰 포션을 차지할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요인이 떠올랐다.
두 번째 남자와도 같은 문제가 있었고
세 번째 남자와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남자는 만남 기간이 짧아 이렇다 할 문제도 발견하기 전에 끝났기 때문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다.
결국 이것이 어느 한쪽에 불균형을 초래하면 비가역적인 문제가 발생하더라는 깨달음이다.
'돈문제'
남녀 중 어느 쪽의 경제력이 우수하건 간에 돈 쓰는 데 있어 '왜 나만 쓰지?'라는 생각이 들면 그 관계는 오래 못 간다.
왜냐면 남녀가 만나는 행위가 다 돈이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도 돈이 있어야 사는 마당에
둘이 있으면 다 돈이다.
만나러 나가는 차비, 기름값도 돈, 식사 비용도 돈, 티타임도 돈, 영화 보는 것도 돈, 여행 가는 것도 돈, 선물해 주는 것도 돈, 치장하고 이쁘고 멋있게 꾸미는 것도 돈
돈돈돈돈.
이것 왜에 다른 이유를 대기가 어렵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사이에?
그토록 그리던 사람을 만났는데 돈 때문에 치사해진다고?
답은 '그렇다.'
배분에 있어 비율 차이가 있건, 남녀 중 누군가의 인성이 썩어서였 건 문제는 돈에서 일어난다.
어느 한쪽이 지출 불균형을 느끼면 불만이 생긴다.
돈 쓰면서 부아가 치미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사랑의 감정마저 옅어진다.
치사해 보일까 봐 속으로 삭이던 돈 얘기가 수면으로 등장하는 순간 그동안 봐온 사람이 아니게 된다.
"너는 100일 날 나한테 뭐해줬어!!"
"밥은 내가 사면 찻값은 네가 내야 되는 거 아냐?"
"회사 다닐 때 벌어 놓은 거 없어?"
도대체 지난 얘기를 들먹이며 그때 돈 안 낸 일화를 끄집어내면 어쩌자는 거냐.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밥 먹고 들른 카페에서 긁은 몇 천 원 카드 결제액까지 거론하기 시작하면 사랑이고 뭐고 없다.
그윽하던 눈이 머리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이때만큼은 똑 부러지고 이성적인 눈빛을 쏘아댄다.
어젯밤 진지하게 나눴던 미래를 향한 대화 내용은 추호도 기억을 못 하면서,
4개월 전 몇 천 원짜리 디저트 값 낸 걸 우물 속에서 물 퍼올리듯 첨벙첨벙 끌어올리기 시작하면,
이 사람 기억력이 이렇게 좋았나 싶다.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에 돈이 끼면 사랑이 사랑으로 안 보인다.
내 돈만 잡아먹는 원수로 보인다.
지출 불균형 문제가 이래서 무섭다.
부모 돈이 많아서 여자한테 펑펑 쓰는 남자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내 수준에서 그런 남자는 못 만나봤다.
부모에게 타서 아낌없이 쓰는 부류보단 대부분 스스로 벌 수 있을 때 여자에게 소소한 선물이라도 자발적으로 해준다.
여기서 '소소한'이란 상대적인 가치다.
학생 시절엔 핸드폰 장식 하나 해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제 힘으로 돈을 버는 이들에게 소소한 선물이라면 옷 한 벌쯤? 되려나? 알아서들 판단하시길.
중요한 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부류들은 성별을 떠나 부모님 돈을 타서 쓰는 시기에는 쩨쩨하게 쓰더라는 사실이다.
연애로 만났건 중매로 만났건 썸이 시작되고 2~3번쯤 만나면, 빠르면 3번째, 늦어도 4번째 데이트부터는 여자가 돈을 엄청 써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애 때 보여준 남자의 기사도(?) 정신에 인지적 혼란이 와서
'아, 내가 공주 대접을 받을 만한 여자구나.'라고 생각하면 대단한 착각이다.
1~2번째 만남 때는 남자가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할 때다. 그러니 좋은 곳만 데려가고 좋은 것만 먹여준다.
그렇다면 나의 두 번째 남자는 어땠는가?
지긋지긋하게 반복해서 싸우다 보면 미운 정이라도 들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자꾸 싸우다 보면 정나미가 더 떨어진다.
거기에 돈까지 없으니 점점 만날 의욕조차 안 생겼다.
내 눈물 어린 글을 익히 보아서 아실 테지만 세 번째 남자는 어땠는가?
그 남자야 말로 관계의 80퍼센트 이상이 결국 돈 문제였다.
돈 쓰는데 아까움을 꽤나 느낀 것이다.
수십 억짜리 집을 가지고 있어도 지출과는 별개 문제다.
그 남자의 가치관이 남녀 반반 부담이라는 개념이 박혀 있으면 게임은 끝난 거다.
우리 독자님들이 저의 눈물로 쓴 세 번째 남자 얘기를 충분히 읽으셨을 것이다.
세 번째 남자 사람에게 호되게 당해 보고 나서 공부했다.
이래 봬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나온 여자다.
공부를 하면 학습 능력이 꽤 괜찮은 편이다.
나중에 연애 스킬이 발전했을 때,
3~4회쯤 만나면 옷이며 고가의 만년필(책과 글을 쓰는 여자인 걸 알고 이런 걸 선물해 주었다.) 등을 받는 호기로운 시절이 있었다.
가만히 있는데 갖다 받쳤을 리는 없고 대개는 은연중에 이끌어내는 식이었다.
생각해 보니 눈물로 쓴 세 번째 남자에게는 이런 것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문제가 큰 이유가 되어 헤어짐을 당했다.
우둔했던 시절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지점이다.
어쨌든 그렇게 선물을 받고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도 안 해주면서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공부는 했으나 실무에 적용할 때 삐딱하게 응용했다.
호기와 후회는 짝을 지어 다녔다. 다행스럽게 이러지 말자고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자들은 비결이 뭔지 알려달라고도 했던 그런 잡스러운 기술은 머지않아 내 가치를 추락시키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남자는 집을 해오니까 생활비는 여자가 더 부담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도 있다. 그러니 여자 직업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케이스라면 여자 쪽 생활력이 기대에 못 미치면 그나마 붙들고 있던 연애 감정도 사라진다. 결혼은 어불성설이다.
다시 처음 의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
배우자감을 찾고 있던 그는 자신의 굵직한 결혼관에 불합치하는 나를 어떻게 수개월 간 만났을까?
그건 중개인 없이 순전히 연애로 만났기 때문에 그나마 6개월이라도 간신히 이어나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연애 감정이 먼저 샘솟지 않고, 조건 맞춤형으로 만났다면 아마 2~3개월도 아니고 두세 번 만남에 끝났을 것이다.
젊음과 가능성 왜에는 모든 게 부족할 수밖에 없던 스물세 살 시절도 목련이 피고 지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돈과 관련된 치사한 시간을 보낸 후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연봉이 올랐고 매달 들어오는 수입은 고정 비용을 제외하면 고스란히 모아졌다.
고정 비용도 큰 금액이 아니었다.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했고 직원 복지로 제공하는 구내식당에서 퀄리티 높고 가격은 저렴한 식단으로 점심을 먹다 보면 쓸 만큼 쓰고도 통장 잔고를 불려주기 충분했다.
웬만한 또래 남자들보다 괜찮게 벌었다.
그래서 그가 내게 불만을 품었던 몇 가지 것들은 3년 후 내 힘으로 거의 다 이뤘다.
만으로 고작 21년 살아온 여자한테
운전도 안 배우고 뭐 했냐고 했던가.
2년 후 나는 내 명의 자동차를 운전하는 오너드라이버가 되었다.
돈 쓰는 게 부담스러워서 못 만나겠다고 했던가.
3년 후 나는 대기업 연봉을 받으며 새 남자 친구가 지갑을 열게 하는 일이 없게 만들었다.
여행 갔다 오는 날 잔뜩 찌푸린 얼굴로 왔던가.
이듬해부터 나는 매년 해외여행을 다니며 준비부터 돌아올 때까지 좋은 추억 만드는 방법을 통달했다.
취사 시설이 갖춰진 장소로 가면 끝내주게 만들 수 있는 음식 2~3가지 정도는 개인기로 준비해 갈 줄 안다.
친구 모임에 어울리지 못하는 나를 보고 이별을 결심했던가.
이후 나는 새 남자 친구의 친구 모임에 나가서 남자 친구 어디가 좋냐는 질문에 이 점이 좋고 저 점이 좋다는 솔직하고 순진한 답이 아니라 "다 좋아요."라고 센스 있게 답할 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나이의 연애를 했고 그는 그 나이의 연애를 했다.
그가 하자는 건 다 했지만 잘 해내지 못했다. 적당히 할 수 있는 건 하고 못할 것은 하지 않고 선별할 줄 몰랐다. 그저 하자는 대로 따라만 가는 연애를 했다.
너를 적당히 구워삶는 실력이 없었던 것.
그것이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아무리 배우자 감을 찾고 있는 남자였더라도,
6개월 탐색 후 이별 통보는 삶의 굴곡이 없어 본 23세 여자가 감당하기에 큰 일이었다.
인간 심리를 관통하는 눈이 그때는 없었다. 세상 경험이 있어야 연애를 주도할 수 있다. 상대를 이리저리 휘두른다는 게 아니라 정신 차리고 연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를 만나던 시절에는 할 줄 몰라 그가 짜증 내고 화를 냈던 많은 것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기억에서 그는 서서히 잊혀 갔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한 가지 제대로 배운 게 있다면,
돈.
돈 쓰는 것에 있어서는 이후 어떤 남자를 만나도 내가 돈 쓰는 걸 문제 삼아 이별 결심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들이 이전에 어떤 여자를 만나왔건,
이번 여자(나)는 제법 자기 돈을 쓰려고 한다며 흡족해하는 미소를 내비치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 게 어떻게 보이냐고?
나를 버린 세 번째 남자가 자기 지갑에서 돈 꺼낼 때 옅게 스쳐 지나가던 분노와 원망의 눈꼬리와 입가를 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더라면,
그 모습을 본 내가 위축되고 초라해지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이후에도 같은 패턴을 반복했을 것이다.
허나 나는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돈문제 없이 연애하는 날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