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29세
금요일 저녁 7시면 나는 서울역 앞에 가있는다.
7시가 조금 넘으면 그가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역전 인파 속 100미터 밖에서도 나를 알아보았나보다.
뛰어오듯 날아오듯 거친 호흡을 뱉으며 어느새 내 시야 내에 들어온다.
만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등에는 땀이 주르륵 흘러 내리면서도 오는 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를 보기 위해 30분 일찍 출근해서 그만큼 일찍 퇴근했다. 퇴근과 동시에 단거리 육상선수의 크라우칭 스타트와 같은 순발력으로 의자를 박차고 나왔다고 말한다.
회사에서 KTX타는 곳까지는 택시를 집어타고 전속력으로 가달라고 했단다. 기차 탑승 후에는 온통 내 생각으로 온몸의 신경 감각 하나하나가 설렘과 기대로 가득찼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남자의 한 시간 반 남짓한 동안 일어나는 신체 변화다.
대전에서 서울까지 장거리 연애를 했던 그는 나를 보기 위해 금요일 저녁에 올라와서 월요일 새벽 KTX를 타고 내려갔다.
금토일 3일 간 나를 만나고 출근 한다. 어떤 때는 월요일 새벽 대전에 내려가 출근했다 퇴근후 열차를 타고 나를 또 보러 오기도 했다.
말만 들어도 피곤한 저 스케쥴을 오로지 나를 보러오는 기대와 즐거움에 다크써클이 내려오고 피부가 거칠어져 얼굴이 수척해지도록 매주 반복했다.
적어도 월요일 새벽에 내려갔는데 당일 저녁에 또 왔다가는 것까진 하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라도 나를 보는게 좋다고 했다.
용광로 같이 타오르는 남자의 마음이었다.
그와 나는 무슨 행사에서 처음 봤는데 오똑한 콧날에 미소년 같은 이목구비가 눈에 띄는 꽤나 미남형이었다.
학벌도 국내 최상위권 대학 석사 출신 수재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인성도 밝았다.
주변 사람들 하나하나 밝게 인사하며 챙기는 매너 가득한 분위기가 그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호감이 갈 만하지 않은가?
쌀쌀한 겨울 날씨 속 틈틈히 온기를 내보내주는 2월에서 3월로 넘어가는 어느 주말.
그가 내게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뛸듯이 좋았다. 내가 관심있는 남자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드디어 내 연애도 해뜰 날이 오는구나.
매주 보는 그와의 데이트는 풀잎 사이로 스며드는 영롱한 햇살 같은 아기자기한 행복 그 자체였다.
그는 내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사랑할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표정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다며 수시로 사진을 찍어 댔다.
사회생활에서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우리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둘 다 벌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지출을 꺼려하지 않았다. 하루를 만난다고 치면 영화부터 저녁식사와 술값까지 대부분 내가 내곤 했다. 그는 그런 점이 고맙고 미안했는지 선물을 몇 백만원 어치씩 사주었다.
아쉬울 게 없던 우리는 그렇게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녔다.
여유로웠고 풍족했다. 내 손으로 벌어 사랑하는 사람과 쓴다. 좋은 곳에서 식사도 했고 놀러 가고 여행 다니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좋은 추억 많이 남기자고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서로에게 속삭였다.
매번 고급 레스토랑만 갈 수도 있지만 추억을 골고루 남겨야 한다며 일부러 재래시장 돼지껍데기집 같은 곳에서 허름한 체험을 하기도 했다.
같이 있는 게 좋았고 하루를 꼬박 있어도 한 시간도 채 안있었던 것 처럼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달달한 시간만이 존재했고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에만 충실하며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