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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뭘까? (3)

그녀의 29세

by 실버반지 Feb 24. 2025

우산 쓰는 것조차 의미 없을 만큼 장대비가 쏟아지는 평일 저녁이다.

그가 대전에서부터 서울 우리 집 앞까지 왔다.


나는 단단히 화가 나있었다.

매주 반복되는 주말만 가능한 연애에 지치고 힘들었다.


결혼생활도 아니고 연애다.

집이 있었겠나 뭐가 있었겠나.

쉴 곳 없이 온종일 영화관, 카페, 인사동, 올림픽공원, 가로수길, 대학로, 백화점 등 번화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제 아무리 무쇠강철이어도 체력적으로 버티기가 힘들다.


오로지 주말에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온 주말을 그와 함께 있는 시간으로 할애해야 했다.

주 5일 일하고 주말에 전혀 쉬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잘못한 건 없다.


원거리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맞았고

내가 그를 사랑했고 그가 나를 사랑했다.

이게 무슨 잘못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우가 쏟아지는 그날 밤

내가 사는 동네에 와서 미안하다 오빠가 잘못했다는 말을 쏟아냈다.

어떻게든 평일에도 올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한다.


나는 아주 도도했다.

조금의 자비로움도 없었다.

왜 이렇게 내가 고생해야 하냐고 (내가 대전으로 가는 것도 아니면서) 따따부따 따져댔다.


여자의 도도함과 남자의 무한한 헌신.

종국에는 이 관계가 불행으로 치닫는 이었다.


연신 미안하단 말을 반복하던 그가 매몰차게 돌아서서 가버리려고 하는 나를 돌려세웠다.

장대비는 그칠 줄 몰랐다. 우산 밖으로 나를 잡기 위해 뻗은 그의 한쪽 팔은 순식간에 빗물로 범벅이 됐다.


한 팔은 나를 잡고, 다른 팔에서는 뭔가가 나왔다.


손목시계.

박스에 넣어져 잘 포장된 상태였다.

한 달 전부터 내게 뭐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없는 것 없다고 딱히 필요한 것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 패션과 몸상태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가장 필요할 것이라 파악되는 한 가지를 골라왔다.


시계도 패션의 일부라며 혼자서 백화점을 다니며 내 얇은 손목에 어울릴만한 시계를 골라봤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 패션 아이템을 고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취향도 선호도도 모른 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매장을 다녔다, 그 사람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 아니면 좀체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걸 줄 때 기뻐할 내 모습을 상상하며 얼마나 행복한 마음으로 골랐을까.


그런데 정작 그것을 건넬 때는 재앙이 닥친 듯 비가 내리는 깜깜한 밤이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져 내렸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어 한 달 전부터 고른 선물이 빗 속에서 행여나 주지 못할까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건네져 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허무맹랑한 투정을 부리며 남자를 괴롭히고 있는 중인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떠날까 두려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고 나이에 맞지 않는 방식의 억지를 부렸다.

이렇게 해도 나를 떠나지 않는구나 싶으면

안도감을 느끼는 나.


유아기 시절 나와 타인을 구별해 가며 스스로 행한 일이 맞고 틀림을 인정받지 못하면 죄책감에 빠지던 아이와 같은 행동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었다.




그는 천성이 워낙 착한 사람이라 나를 위주로 맞춰주었다.

대전에서 서울까지 와서 금, 토, 일요일을 보낸 사람이 더 피곤할 터인데 내가 집까지 들어가는 걸 보고 기차를 타러 서울역으로 향했다.


도어 투 도어까지 왕복 세 시간 걸리는 길을 매주 한 걸음에 달려왔다. 반대의 상황은 해본 적이 없어서 힘듦의 깊이를 알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말에만 보는 장거리 연애가 쉽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는 과정이 이렇게 힘에 부치면 오래가기가 힘들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나뭇잎처럼 활활 타오르는 마음도 시들해질 때가 온다.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금요일 밤에 도착해서 일요일 밤에 내려가던 일정은 차차 일요일 낮에 가거나, 토요일까지 만나고 일요일은 쉬거나 하는 식으로 짧아져 가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타오르던 마음도 식을 때가 오나 보다.

그도 나에게 연일 계속되는 대전에서 서울로 오는 주말 일정이 피곤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간을 주었고 이제 내가 좀 더 기다리게 되었다.


아직 괜찮았다.

마음이 떠난 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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