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키우는 것도 아니고 연인 관계에 있는 다 큰 여자가 부리는 억지와 투정에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결정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나는 원거리에서 봐야 하는 단점을 개선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직장 다니는 것은 생존이다. 그것을 바꿔야 가능한 일인데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심스레 결혼을 제안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만나서 나를 바라볼 때 보이는 애틋한 표정과 다르게 정면을 응시한 채 무표정했다. 숫제 입을 꾹 다물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당장은 할 수 없으니 언제 정도로 시기를 예상해 보자라는 식의 상의의 말을 건네는 일도 없었다.
결혼이 결 자만 꺼내면 입을 다물고 나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앞만 쳐다보았다. 어서 이 말을 끝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좋다는 말도 싫다는 표현도 아니었다.
결혼 적령기를 달리고 있는 두 남녀 사이에 나올 법한 반응은 아니었다.
내가 좋다면서 주말마다 심지어 평일에도 장거리를 한 걸음에 달려올 정도로 의욕 넘치는 남자가 보이는 반응 치고는 혼란스러웠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 만남을 이어가려면 앞으로도 체력이 부치고 피곤함에 찌들어 살아야 할 텐데 대체 어쩌자는 거지?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이 관계는 1년 여를 보내고 난 후 서서히 계절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같이 사는 공간 없이 주말에만 보는 건 녹록지가 않았다. 게다가 남자는 당장 결혼할 의사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결혼할 돈이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온전하게 준비되었을 때 그때 하려고 한다는 말이었다. 지난 두 남자에 이어 이번에도 또 돈문제다.
그게 언제가 될지 어떻게 돈을 모아갈지에 대한 상의 없이 혼자서 생각했다.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일한 연한은 나와 비슷하지만 석사 출신이라 연봉도 나보다 높았는데 한 푼도 모아놓은 돈이 없다는 게 놀랍긴 했다.
나와 보내는 시간 동안 돈을 많이 써서 그런가? 그래도 그렇지 몇 개월 사이에 몇 년치 연봉을 썼다는건 말이 안되지. 다른데 나가는 돈이 있나?
지방에 거주해도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임대료와 관리비를 전혀 내지 않고 조식까지 지급받으며 생활하는 사람이다.
직장생활 4년차 대기업 과장이 조금도 모은 게 없다는 건 이해가 안됐다.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부터 믿지 말아하 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그의 계산일 것이다.
일차적으로 남자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성사되지 않는 게 혼인이다.
우리 관계는 결혼의 기로에서 막을 내렸고 이후 두 번 정도 만남을 가졌으나 의미 있는 만남은 아니었다.
내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요청에 수락해서 나온 만남일 뿐 예전 같은 뜨거움은 없었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눴고 의미 없는 식사 자리를 가졌다. 연인을 바라보던 애틋한 눈빛이 옆자리 동료를 쳐다보는 시선처럼 무덤덤하게 바뀌어갔다.
두 번째 무의미한 만남을 가진 날 저녁 깨달았다.
그날 본 그의 눈빛은 더이상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겠다는걸.
집에 와서 그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그동안 만나줘서 고마웠다고
이제는 다 잊고 잘 살아가겠다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회신이 왔다.
그의 메시지는 간결했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잠시 적어본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를.
"지난번 보다 얼굴이 편안해 보여 마음이 놓인다.
좋은 추억 많이 남겨줘서 고마워.
실버반지 예쁘다고 막 달려드는 남자 말고,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 만나.
예전에 오빠처럼."
투박하지만 진심을 다해 쓴 저 메시지를 뚫어지게 읽고 또 읽는 바람에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토씨하나 안 틀리고 기억나는 형벌을 내렸다.
그는 마음이 완전히 떠나 더 이상 나를 보는 게 무의미해졌을 때도 내 축복을 바라주었다.
그가 내린 이 자비로운 저주로
일상생활 속 사람에 치이고 삶의 곤욕을 겪을 때
문득 떠오르는 저 메시지 구절들로 인해 마음 한 켠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아, 나를 저렇게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 있었지.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
소중한 가치를 인정해 준 남자.
가장 마음 아픈 연애였지만
가장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나를 볼 수 없는 날까지도 나를 축복해준 것처럼
나도 그의 행복을 바래본다.
이제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된 그가
지구 어디선가 잘 살아가기를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