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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몹쓸 말버릇 손버릇!

그녀의 22세

by 실버반지

쓰다 보니 그에 대한 험담만 늘어놓는다.


이 글 끝에는 이제껏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반성이 나온다.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한 밑작업(?) 이랄까.


사람인지라

계속 이용해 먹진 못다.

언젠간 그를 놓아주었다.


나쁜 여자의 최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또 한 번 잡담을 풀어본다.





다섯 살 많은 그에게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었다.


사람을 슬슬 놀려 먹으며 반응을 보고 재미있어하고 그런 반응을 보려고 또 놀림을 반복하는 굉장히 나쁜 버릇이었다.


귀하게 자란 막내딸 어렵게 공부시켜 학교 보내고 뒷바라지해 주시는 부모님이 계신다. 예쁘고 소중한 대학 초년생 여자가 그 남자에게는 놀려먹으며 킥킥거리고 웃는 대상이었다.


그는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이름이나 책가방, 머리핀 등을 가지고 놀리고는 메에롱하고 도망가는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애처럼 굴었다.


내가 너무 좋다고 말하면서도 행동은 열 살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니 그의 실제 나이와 하는 행동에서 벌어지는 격차 때문에 나는 그에게서 도저히 매력을 이끌어내려야 낼 수가 없었다.


스물일곱 살 남자라면 이런 남자다움이 있구나라는 듬직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 번씩 놀려 먹고 내가 불같이 화를 내고 집에 가버리면 쫓아와서 손을 잡고 잘못했다며 스킨십을 시도했다.

그럴 때면 전생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아 잽싸게 몸을 피해 도망쳐 쏜살 같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제대로 연애가 될 리가 있겠나?


이때 내가 좀 더 성숙한 연애를 할만한 상대를 만나 차곡차곡 과정을 밟아갔다면 다음 연애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만날 때마다 대판 싸우는 일이 반복되던 이 연애는 시간이 지나 교우들과 사이가 개선되면서 지쳐기 시작했.

그가 알고 있으면서도 당해 주었던 그를 이용해서 학교 생활을 하던 나의 목적도 불필요해져 갔다.


1년 여 동안 조금이나마 쌓여가던 그를 향한 얄팍한 애정도 모래성처럼 스르륵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반면 그는 나를 만날수록 좋아하는 감정이 커져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놀려먹는 못된 습성을 고치지 못했다.


심지어는 놀리고 나서 화 인생은 아름다워 마지막에 귀여운 조슈아가 연합군 탱크에 올라타 뭘 씹어 먹으며 해맑게 웃는 장면을 보고는 '우리도 저런 애를 낳자'라고 하는 바람에 아연실색하고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실컷 놀려 먹고 웃음의 원천으로 삼은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애를 낳자고 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그에게 텔레파시가 전해진다면 나에게 자행했던 너의 그 몹쓸 버릇이 살면서 후회되지 않았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이 바닥을 뚫고 지구 중심까지 내려가려고 할 때 시간은 흘러 어느덧 화이트데이가 되었다. 그와 만나게 된 지 1년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그는 그 시절 어느 외국 간식을 파는 매장에서 사탕, 과자, 껌, 초콜릿 등을 가득 사서 30센티미터가량 정사각형 상자에 넣어 끈으로 묶어 나에게 주었다. 무거워서 팔이 아플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몇 주 전부터 좋은 게 들어올 때마다 사모아 넣었다며 순진한 미소를 지으면 나에게 줬다. 그걸 옆에 놓고 같이 커피숍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라 치는데 그는 또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를 놀려먹기 시작했다.

하. 놀리고 화내고 집으로 가고 감정이 상하고. 이 레퍼토리가 반복됐다.


그날 화이트데이 선물 상자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도 행방을 모른다. 다만 그날 싸움은 여느 때와 달랐다.


선물을 준비해서 여자친구를 감동시키려 했던 남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게다가 나는 그렇지 않아도 감정이 식고 있는 와중에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놀림-싸움 레퍼토리로 성격 형성에 영향을 줄 정도로 날이 서있었다.


참.. 이 어찌 20대 초와 후반 남녀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민망하다.


이후 그와는 한두 번 더 접촉이 있었지만 삐뚜름하게 어긋난 관계는 벌어진 틈으로 곪아버린 자리에서 흘러내리는 찐득하고 불순물 섞인 닦아지지 않는 농양 같았다. 어느 한쪽에서 적극적으로 치유하려 하지도 않았다. 어떤 날은 날이 좋았는지 스스로 자기반성을 했는지 한 사람이 다가가려 하는데 한 사람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속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를 좋아하는 감정이 내게 없었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감정 소모는 필연적으로 수반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내 친구와 혜화동에서 술을 한 잔 마셨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술에 취해 기사 아저씨에게 한껏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기사 아저씨는 내게 아가씨는 현명해서 잘 해결할 거라는 립서비스를 해주셨다. 집 앞에 도착해서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그날 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모적인 싸움에 그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그는 내게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지금 통화한다 해도 달라질 게 없다고 말했다. 남아 있는 감정이 없던 나는 그 말에 일말의 상처도 받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고 다시 잘해보려고 전화한 것이 아니라고.


마지막 말, 이 말이 꼭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화기를 너머 그와 보냈던 1년 여 시간 중 처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았다. 뜨거워진 눈과 목젖을 느끼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잠시 쉬는 템포를 가진 후 말했다.


"미안해."




이후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 학교 앞 칼국수 집에서 어떤 여자와 함께 밥을 먹고 나오는 걸 눈이 딱 마주쳤다. 휴학 후에 복학한 1년 차이나는 후배였다. 우연이도 본 그 모습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내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또 그 안에서 만나는군."


어떻게 그녀를 꼬셨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이상 실낱같이 남아있던 희미한 기억들 마저 추억이라 부르기 머쓱해졌다. 최소한 같은 과내에선 만나지 말았어야지..


이후 수업이 겹치는 강의 시간 외에는 그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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