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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서도 당해준 남자

그녀의 22세

by 실버반지

뿔테와의 일 이후 나를 향한 쑥떡거림은 도를 넘었고 급기야 왕따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처가 어디서 나왔는지 뿔테를 보기 좋게 차버리겠다는 말을 내가 했다는 것이다. 오해였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말은 눈덩이처럼 무섭게 커져 갔다. 이미지 메이킹에 능숙했던 그는 피해자 옷을 완벽하게 착장 했다.

온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챙김을 받던 애가 그토록 착한 남자를 차버렸다는 스토리는 조교들과 교수님들까지 알 정도였다.


설득 화법을 전혀 할 줄 몰랐던 나는 적절한 처세도 하지 못하고 엄청난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2학기에는 군입대를 앞둔 서너 명 남학생들이 불쌍한 나를 측은히 여기고 끼워줬다. 그 외에는 누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오리무중이라 다들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소심한 성격에 동료들 무리에 어울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다가온 한 남자가 있었다.


전에 다른 글에서 한 번 언급한 적 있는데 다섯 살 연상의 만학도였다. 재수를 여러 번 해서 학교에 늦게 입학했다는 그는 아이들 사이에 꽤 평판 좋은 형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 남자를 이용했다.


그의 사귀자는 제안에 속마음은 전혀 반대였음에도 겉으로는 입가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너무나 좋다고 표현했다. 2학기 중반이 넘어가던 시점이었지만 그가 말하기론 학년 초 처음 봤을 때부터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고 했다.


그랬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채 내 행동거지를 관찰당했다는 것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낮에는 과 애들 모르게 수업 끝나고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나거나 우리 집 근처에서 보곤 했다.


이렇게 하는 게 그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교제 사실이 알려졌을 때 과에서 받을 노여움이 의식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왕따이긴 했지만 매력도가 낮진 않았다.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이성들이 몇 명 있다는 걸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얼마나 나빴냐면,

그의 관심을 끌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행동은 하지 않은 채, 내 안정적인 학교 생활을 위해서만 그를 끌어들였다.


정신은 다른데 가 있으면서,

공간적 거리만 가깝게 유지했다.


옆에서 걸을 때면 옷깃만 스쳐도 슬쩍 피했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직 순수해서 그러는 것처럼 포장했다.


같이 영화 보러 가기로 한 날 그와 저녁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낮에는 다른 남자와 같은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었다.


다른 남자들과 술을 마시면서 친한 동료들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통화를 했고,


내 생일 저녁엔 그와 약속을 잡고 낮에는 다른 남자를 만나 선물을 받았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동기가 보자고 할 때 친했으니까 만나러 나간다며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나갔.


과제를 한다며 그가 보는 앞에서 버젓이 다른 남학생과 수다 떨며 도움을 받았고,


팀과제를 위해 조를 짤 때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남학생을 그와 함께 넣어 조 편성을 했다.




그와 연애할 때 또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학생 신분인 두 사람은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나는 방학 때만 겨우 했던 아르바이트로 몇 십만 원 가지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걸로 학교 다닐 때 점심값이며 옷값, 미용실 비용 등을 써야 했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교우들과의 관계 유지도 필요했다.


그는 장기간 수능 공부에 매달린 탓에 스물일곱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가진 돈이 전혀 없다고 했다. 나이가 많아서 알바 자리 구하기도 어렵다며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노동 말고 컴퓨터로 작업하는 뭔가를 했었다. 그게 돈벌이가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어 거기서 번 돈으로 지출을 해봐야 빈곤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돈에 대한 현실 감각도 없었다.

당시 밥 한 끼에 인당 4~5천 원가량 했는데, 나에게 가지고 있는 돈이 5천 원뿐이니 분식집이나 편의점에서 가볍게 먹자고 말했다. 그는 안된다고 했다. 끼니는 잘 챙겨 먹어야 한다며 제대로 된 밥집에 가야 한다고 어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중에 있는 돈이 그것뿐인데 뭔 식당에 들어가 밥을?


현실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불어 그런 구질구질한 연애를 이어가야 하는 내 좁은 인간관계도 개탄스러웠다.


갈만한 음식점이 없으니 길만 계속 걸었다.

난 계좌에서 만원 짜리 몇 장을 인출하기로 하고 ATM기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돈 없는 건 죄가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없이 따라오는 그를 보고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계산을 못한 것이 아니다. 결국 내 지갑에서 돈을 끌어낼 때까지 결정은 하지 않고 길가만 서성였던 것이다.


성적인 매력도, 외모에 대한 끌림도, 하물며 재력에 대한 속물스러운 탐욕도 없이 시작한 연애는 시작부터 꼬여 있었다.


그렇게 사람을 옆에 두고 얻고 싶은 것만 챙기고 마음은 주지 않는 그도 힘들고 나도 소모적인 연애를 1년 넘게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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