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이제 그만!
"나 때는 이런 거 없이도 했어."
"보호복 입고 어떻게 일을 빠르게 하나?"
"(보호장비 착용 후)일 못하겠다."
"설마 나한테 사고가 발생하겠어?"
그 중 최악은 "너나 해라"였다. 내가 동료에게 안전모를 건네면서 들었던 말이다. 안전모를 들고 있던 내 두 손은 동료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짜증이 확 밀려왔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동료를 뒤따라갔고 그의 머리 위에 안전모를 올렸다.
안전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굳게 믿는 신념 중 흔이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 것만 같다. 나만 안전이 중요한가보다. 같이 일하는 선배 기술자들을 설득하는 일은 마치 벽을 두고 대화하는 느낌을 준다. 돌려서 말해보고 농담도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신께서 그들만 따로 보호해주나보다.
그럴 때마다 내 모습이 초라해진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뒤돌아 안전관리자에게 연락해 한 번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작업 시작 전부터 힘이 빠진다. 차라리 이 이야기가 허구였으면 좋겠다. 지긋지긋한 안전불감증. 벌써 나는 4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무가 좋았다. 학창 시절 미술 선생님에게 '내가 좋아하는 그림 그려보기'라는 주제로 숙제를 받으면 항상 나무를 그렸다. 푸른 하늘이 펼쳐진 언덕 위의 나무 한 그루. 그런 나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시간이 흘러 자연과학은 취직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갔다.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그런 직장으로 말이다.
첫 직장은 안정적이었다. 주변 어른들이 모두 좋아했다. 이제 여자친구를 만나 결혼하는 일만 남았다며 좋은 선택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나는 눈앞에 펼쳐질 지옥문을 보지 못한 채 헛된 희망을 품고 살고 있었다. 그 칭찬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만뒀다.
그만두기 전 내가 좋아하는 나무가 있는 산에서 일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강릉 <임업기계훈련원>에서 실시하는 산림기능사 양성 과정에 등록했다.
그 후로 나는 산림기능사를 취득했고 퇴직도 했다. 나무를 다루는 일을 찾아 떠났다. 3평 원룸 방에서 혼자 하는 고민은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고 빨리 이 곳을 탈출해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이 옛 기억을 되살려 나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주변 어른들에게 무직인 나를 써달라며 연락을 돌렸다. 내가 가진 건 체력과 패기밖에 없었다.
얼마 후 그 중 한 분에게 연락이 왔다. 서울 어느 동에서 나무를 베는데 치울 사람이 필요하다 그랬다. 일당은 15만원이었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대답했고 현장을 갔다. 내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무를 베는 현장에서 어떻게 기술자가 일을 하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욕심이었을까 나는 잘려진 나뭇가지와 통나무를 옮기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갔다. 심지어 어떻게 기술자가 나무를 베는지도 못 봤다. 실망을 한가득 안고 집을 향하는데 건물 거울 속 비친 내 모습이 세상 초라해보였댜. 이제 겨우 하루 일했을 뿐인데.
흔히 '노가다 잡부'라고 불리는 일은 반복됐다. 내 눈은 동태 눈깔처럼 초점을 잃었고 아무 생각 없이 나무만 옮기고 있었다. 퇴근 후 피곤하다고 잠만 잤더니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 감정을 느낀 이후로 산림청, 임업진흥원에서 실시하는 목재등급평가사 양성 교육과 목재 생산업 교육을 신청했다. 나무와 관련된 모든 걸 배우고 싶었다.
일용직을 하며 번 돈은 모두 다 교육비와 장비구매비로 사용했다. 안전 장비를 하나씩 갖추고 엔진톱을 구매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던 중 내게 큰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 모 재개발 단지에서 가로수를 제거하는데 보조 톱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을 받은 후로 나는 안전불감증과 본격적인 사투를 벌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