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만큼 위험한 게 세상에 있을까. 대개 사회는, 그리고 꿈을 좇는 사람들은 꿈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포장에 속아 그 이면에 잠재된 폭력성을 외면하고 만다. 그들은 전혀 예정돼 있지 않은 성취의 순간 또는 가시적인 물리적 결과에 탐닉한다. 마침내 자랑할 만한 결과를 얻어냈다면, 이제 아직 자신의 위치에 오르지 못한 도전자들에게 결과의 달콤함을 설교하고 꿈의 성취 과정에 필히 수반될 노고와 땀의 숭고함을 연설할 차례이다. 하지만 웃기게도 꿈은 허상이다. 우리는 그 꿈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그 옆에 장신구처럼 붙어 있는 수식들을 나의 본체로 치환시키길 원할 뿐이다. 칼이 그토록 동경했던 어릴 적 우상 찰스 먼츠의 추함을 목격한 뒤, 마침내 별 볼 일 없는 파라다이스 폭포를 마주하였을 때 느낀 당혹감은 그래서 솔직하고 현실적이다. 픽사가 조언하는 이 삶의 진실은 사회의 통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어쩌면 관객의 불편을 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이 장면에서 사소한 불편조차 느끼지 못한다. 외려 픽사의 따뜻한 품에 안겨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아이러니한 감동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꿈의 물리적 결과를 강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결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역설적인 대목이다.
찰스 먼츠는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통념을 그대로 대상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사회의 편견과 시기에 의해 초기의 순수함을 잃었다. 결국 그는 모험을 즐기지 못하고 괴물을 생포해 잡아오겠다는 물리적 증거와 결과에 집착하게 된다. 태초의 목적은 완전히 변형되고 이면에 몰래 숨 쉬고 있던 폭력성은 그를 완전히 휘감아 인간을 죽이는 경지에 이르게 만든다. 칼은 이런 찰스 먼츠의 생애를 다룬 짧은 필름을 감상하고 그에게 완전히 동화된다. 칼은 명백히 제 2의 찰스 먼츠다. 잘못 변질된 꿈과 그 꿈이 다른 이에게 전이되는 과정. 현실의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장면에서 우리가 쉽게 칼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칼의 삶을, 아니 우리의 삶을 프레임을 통해 객관적 위치에서 판단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모험은 마음을 거는 것
러셀은 케빈이 마음에 들어 폭포까지 데리고 가자며 칼에게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혹시나 후에 약속을 깰지 모를 칼에게 넌지시 “마음을 걸어요”라고 덧붙인다. 마음을 걸라니. 이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온 저 말은 내게 다소 충격적이었다.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어린 아이여서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걸라는 건 어린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감정적 논리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성보다는 감정. 그 충만한 감정을 성실히 인정하고 이행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모험가가 지녀야할 아주 기초적인 태도가 아닐까. 칼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란다. 그는 그간 꿈의 수행-파라다이스 폭포에 도착하는 것-이라는 이성의 논리에만 빠져 있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처럼 다가온 사랑스러운 더그와 케빈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러셀과 달리 칼은 감정적 동요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고 이성적 결실만을 위해 마치 목적이 정해진 기계처럼 행동했다. 찰스 먼츠에게 모험의 개념을 배운 칼은 마음을 걸어야 하는 모험의 과정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물리적 결과를 위한 힘을 비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러셀이 더그와 케빈이라는 은총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처럼 모험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라는 걸 칼은 다소 늦게 깨닫는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러셀이 던진 “마음을 걸어요”라는 대사가 이미 나온 바 있다는 사실이다. 러셀처럼 중요한 대사로 인식되지는 않았으나 초반부, 소녀 엘리는 소년 칼에게 자신의 모험책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는 서약으로서 마음을 걸라고 요구한다. 작품 내내 동그란 이미지로 엘리와 러셀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 핵심적인 대사에 이르러 러셀은 엘리의 환생처럼 보이게 된다. 어린 소년으로 탈바꿈 한 엘리는 자신의 물리적 죽음 뒤에 뜬금없이 등장해 칼에게 모험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일러준다.
따라서 칼이 내적으로 완전히 변화하게 되는 지점은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그는 우역곡절 끝에 파라다이스 폭포에 당도하게 되지만 그것은 그에게 그저 하나의 폭포에 지나지 않았다. 폭포 옆에 자리 잡은 집 역시 그냥 집일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꿈을 이뤘기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집으로 들어와 엘리의 모험책을 펼친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라는 글귀 뒤에 엘리가 붙여 놓은 자신과 그녀의 결혼 생활 사진을 본다. 젊었을 때부터 노년기까지 엘리는 칼과의 결혼(모험)의 과정을 축복하고 있었다. 본디 하나의 순간, 하나의 물리적 결과물이 모험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칼은 이제 찰스 먼츠의 자장에서 완벽히 벗어난다. 칼은 결혼이라는 물질적 증거가 아니라 엘리와의 긴 모험의 여정이 축복이었던 것처럼 파라다이스 폭포 자체가 아니라 모험의 여정에서 만난 러셀과 더그, 케빈이 더욱 소중한 삶의 진실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는다. 그는 이제 ‘마음’을 따라간다. 그래서 하나의 물리적 증거로서 의미 붙여진 사진들과 부부 의자를 포함한 갖가지 사물들을 버리고 지나온 모험을 이제라도 제대로 느끼기 위해 러셀에게 향한다.
꿈은 유동적인 이야기 모음집
<업>에서 가장 기묘한 부분은 칼이 자기 집을 등에 매달고 걸어가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보면 일순 일차원적이면서 근원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집은 왜 이렇게 가벼운가. 많은 양이긴 하나 한참 모자라 보이는 풍선에 의해 칼의 집이 하늘을 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의 물음이 떠오른다. 혹자는 이를 단순히 애니메이션적 표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왜냐하면 <업>의 초반부는 실사로 재현하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적 인장을 서두에 명확히 공표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과 달리 <업>은 21분이 되어서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특히 칼의 집을 중심으로 주변부에 마천루 공사가 한창인 장면은 현실적 기시감을 즉각 느끼게 한다. 노년의 저항자가 신체의 강함은 상실했으나 소유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무기로 끝까지 자기 집을 지키는 형국은 우리가 현실의 뉴스나 기사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대로다. 도대체 <업>은 왜 21분이 지나서야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자문해 봐야 한다. 가벼운 집은 과연 단순한 애니메이션적 상상력의 표현일까. 나는 그것을 뛰어넘는 노골적인 메타포라고 본다.
집은 어떤 공간인가. 칼에게 집은 그리 복잡한 대상이 아니다. 오프닝에 제시된 죽은 아내와의 아름다운 사랑 스토리의 주된 무대. 수십 년의 결혼 생활이 함축되어 있는 공간. 칼에게 집은 엘리와의 이야기가 담긴 한 편의 책이다. 그런 점에서 집이 풍선에 의해 비행선으로 탈바꿈되는 충격적인 장면은 이미 예견된 것일지 모른다. 소녀 엘리는 소년 칼에게 파라다이스 폭포까지 비행선으로 데려다주라고 부탁(?)한다. 엘리의 물리적 죽음 이후, 칼은 ‘집이라는 비행선’으로 아직 모험책 안에 이야기 형태로 살아 있는 엘리를 파라다이스 폭포까지 데려다준다. 그리고 결말부에 이르러 칼은 찰스 먼츠에게서 빼앗은 비행선으로 러셀과 함께 하늘을 누비며 새 이야기를 써나간다. 한 마디로 칼에게 비행선은 실제 모험담을 담은 이야기책과 같다.
하지만 칼의 집은 단순히 하나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희망을 품을 때면 언제나 위로 떠오르는 풍선과 결부된 꿈의 형상이기도 하다(엘리가 칼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와 칼이 엘리에게 생의 끈을 놓지 말라고 애원할 때, 풍선은 항상 그 간절한 바람을 담은 채 떠 있다). 때문에 집을 끝내 추락시키고 러셀과 더그, 케빈을 살리는 장면은 무척 상징적이다. 이는 단순히 칼의 내적 변화와 아름다운 구출의 순간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픽사가 내리는 꿈의 정의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칼이 꿈이자 이야기인 집을 버린 것이 아니라 놓아주었다는 점이다. 마치 자기를 두고 떠나라는 어느 대원의 간절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붙잡았던 손을 놓아주는 재난 영화의 클리셰처럼 말이다. 그는 이제 한 편의 꿈 이야기를 종결시키고 새로운 비행선에 오른다. 그리고 새로운 꿈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것은 러셀의 유사 아버지로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것이다. 이는 찰스 먼츠가 고정된 상태의 조각, 모형 등에 집착했던 것과 대비되는 유동적인 칼의 선택을 보여준다.
본디 이야기는 우연적 사건 혹은 우연적 모험에 사로잡혀 시작된다. 때문에 이야기는 언제라도 시작될 수 있다. 때로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모험책처럼 이야기의 사건이 길게 유보될 수도 있고 칼의 경우처럼 종결되었기에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엘리가 그토록 강조했던 꿈의 여정, 이야기의 여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날 때의 뜻하지 않은 축복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랑스러운 케빈과 더그, 그리고 러셀이라는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다. 꿈은 증명해야 할 업적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이며 유동적인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픽사의 새로운 정의를 우리는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