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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9. 2023

<애플>, 이토록 슬픈 망각의 불가능성


이토록 슬픈 망각의 불가능성



기억상실증이 특별한 소재로 기능하지 못한 지는 오래 되었다. 너무 많은 작품에서 소모되었던 이 소재는 이제 여러 복합적인 설정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그러하듯 개연성의 측면에서 작품 속 기억상실의 발현 계기는 대개 명확하게 제시되는 편이다. 외부의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뇌의 손상, 혹은 내적 스트레스와 정신적 충격과 같은 심인성 질환에 의한 발병. <애플>의 흥미로운 점은 기억상실증의 발병 원인에 관한 무수한 연구 사례들을 무시하고 이를 마치 미지의 증상처럼 재현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엔 어떤 원인도, 사연도, 분석도 없다. 영화는 기억상실증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는 기이한 설정만 공유할 뿐 작중 의사들조차도 이 질병에 대해 별다른 진단을 내리지 못한다.


기이한 설정이 중요하다는 점에선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독특한 설정에 매료되어 있는 것은 신화적 세계관을 창조하고 그 속에 비관적 우화를 그려냄으로써 인간의 본질과 현실 세계의 구조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탐구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그에겐 거리두기를 위한 우회로가 필요한 것이다. 크리스토스 니코우도 나름의 우회로를 상정하긴 하지만 그의 세계에 속한 인물들은 결정적으로 란티모스의 인물들과 달리 이 기이한 설정을 그냥 묵과하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기억상실증이 전염되는 현상을 비상사태로 간주하고 그 원인을 진단하여 해결책을 마련하려 애쓴다. 관객이 영화의 극단적인 배경 설정에 의아함을 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듯 작중 인물들 또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는 것이다. 그렇기에 <송곳니>, <더 랍스터>와 같은 란티모스의 영화들이 공감하기 힘든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관객들로 하여금 스크린의 세계와 현실 세계의 간극, 그리고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생경한 세계의 축조를 관찰하게 만드는 것과 달리 <애플>은 작중 세계와 인물들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의 정도를 스크린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간극의 정도와 비슷하게 조절함으로써 관객의 동화작용을 그대로 수용한다. 때문에 <애플>은 란티모스의 영화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크리스토스 니코우가 운용하는 이 현실감은 인물의 감정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고 종국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누구나 망각하고 싶은 기억 하나쯤 갖고 있지만 그 비극적 기억을 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설사 어떤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더라도 그 결과가 정말 망각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심지어 기억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유영하며 연쇄반응을 일으켜 끝내 우리를 괴롭혀 온다. 자발적으로 떠올리지 않더라도 특정 기억과 관련된 유사 행위나 물품을 목격하고 인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기억은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시의 스틸사진을 영상으로 재생시키고 그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렇게 꼼짝없이 현장 한가운데로 입회하게 된 우리는 이 무한한 반복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과 체념을 경험한다. <애플>은 이러한 현실적 감각을 질료 삼아 기억과 망각 간의 역학을 탐구하고, 종국에 망각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정말 망각을 원하는가


이 영화엔 반전이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보였던 알리스는 사실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승화시키는 수단으로서 환자 행세와 병원에서 추천한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토스 니코우는 이 반전을 정말이지 지나칠 정도로 엉성하게 찍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는 반전이 내뿜는 충격 효과에 아무 관심이 없다. 알리스는 과일 가게 점원에게 병원에서 마련한 거주지 대신 본가의 번지수를 잘못 알려주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레시피를 아는 듯 손쉽게 음식을 요리하며,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안나에게 호러 영화의 관습에 대해 언급하고,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Sealed With A Kiss'를 무의식적으로 따라 부르는 데다, 결정적으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 주민의 반려견과 반갑게 인사하기까지 한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자기 정체성의 탄로. 그렇다면 역으로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허술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가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토대로 위에 기술한 순간들을 다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이때 발견되는 것은 알리스의 허술한 연기 속에 배어 있는 슬픔의 정서다. 설명하기 힘든 이 독특한 슬픔은 영화 전체를 관류하며 특유의 공기를 만든다. 숨기고 싶지만 숨겨지지 않는 것. 망각하고 싶지만 망각되지 않는 것. <애플>은 마치 <식스 센스>의 표면적인 반전 구조를 따르는 듯 위장한 다음 이를 끝없이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내면의 멜로드라마를 완성한다.


영화가 머금고 있는 슬픔의 기원을 추적하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알리스는 정말 과거를 잊고 싶은 걸까. 그는 아내를 잃고 나서 기억상실증 환자로 둔갑한다. 그리고 기억상실증 환자들에게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주기 위해 고안된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간호사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기억이 돌아올 수는 없다고 선을 긋지만 ‘새로운’이라는 단어가 과거를 전제하듯 새로운 자아는 기존의 자아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프로그램에서 지시하는 미션들은 결국 과거의 어떤 경험이나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목표로 짜여 있다. 그런 점에서 아내를 잃은 기억을 지우려는 알리스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는 망각을 원하면서 왜 기억을 되살리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걸까. 요컨대 알리스는 지금 망각의 욕망과 기억의 비가역성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크리스토스 니코우는 묻고 있는 것이다. “정말 망각을 원하시나요?” 망각과 기억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욕망 사이에서 우리는 진정 일말의 여지도 없이 한쪽을 선택할 수 있을까(우리는 이미 <이터널 선샤인>을 통해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이 도리어 가장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알리스는 지금 망각과 기억을 동시에 욕망하고 있다.


기억의 대체 가능성



이후, 알리스에게 아내와의 기억을 망각할 하나의 가능성, 더 정확히는 그 위에 포갤 수 있는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는 프로그램의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찾은 극장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때 그녀의 이름이 알리스의 아내의 이름이기도 한 ‘안나’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알리스는 그녀와 미션을 함께 수행해가며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결국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 그녀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고쳐준 뒤 먼저 구애의 신호를 보낸다. “더 있다 갈래요?” 프로그램의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그녀가 제안을 거절하자 그는 허락을 맡고 그녀의 미션 수행에 동행한다.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클럽. 그곳에서 안나는 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라는 프로그램의 미션을 알리스를 상대로 완수하려 한다. 그녀의 급진적인 접근을 밀어낸 알리스는 머지않아 그것이 사랑의 감정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지시 사항이었음을 알게 돼 좌절한다. 그렇다면 안나는 여태 알리스에게 조금의 성적 긴장도 느끼지 못했던 걸까. 이때 상기해야 할 것은 알리스가 먼저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우리는 아직 안나의 속마음이 어떠한지 명확히 알 수 없다(클럽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난 뒤, 안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알리스에게 “커플만 남았어요.”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미션 수행을 위해 그와 성관계를 맺고자 결심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니 커플만 남았다는 일종의 하소연과 같은 말은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바람을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알리스의 사랑이 미끄러지게 된 건 안나 때문이 아니라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시스템 때문이다.


시스템은 위장된 사랑이며, 인위성을 통해 모종의 감정을 추출해 내는 기계적 관계의 표상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시차이다. 알리스보다 일찍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안나는 그보다 한 차례 상위의 미션을 부여받는다. 알리스는 안나를 통해 다음 미션 내용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며, 그녀에게 줄곧 미션의 수행 파트너로 선택됨으로써 사실상 미래의 일을 현재에 앞당겨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안나는 알리스의 미래에 해당한다. 때문에 알리스는 이미 경험한 미래와 과거 사이에 서 있는 이상한 존재다(너무 당연하게도 현재는 계속 경험 중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기억하는 자이다. 현재라는 시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가역적인 측면과 과거의 경험이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잊힐 수 있는지 확실치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알리스가 상대적으로 쉽게 지울 수 있는 기억은 미래의 기억이다. 그는 안나를 만나기 전까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세계를 이해해나가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새로운 자아를 만들겠다며 간호사를 찾아간 뒤 그녀의 차에 탔을 때, 그의 시점 쇼트로 보이던 세계는 점점 흐릿해져갔다. 세계를 축소시켜 놓은 듯한 4:3의 화면비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받아들이며 살겠다는 알리스의 의지의 표상이 아니던가. 결국 알리스는 안나를 떠난다.



한편, 안나의 관점에서 둘의 관계를 탐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측컨대 안나 역시 알리스처럼 기억상실증 환자를 연기하고 있는 정상인일 것이다. 알리스가 자기도 모르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Sealed With A Kiss'를 흥얼거렸던 것처럼 안나 역시 알리스에게 무의식적으로 <타이타닉>의 줄거리를 들려준다. 이 대목에서 알리스는 안나가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나는 알리스가 공포 영화의 관습을 말하던 첫 만남 때부터 그가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알리스와 안나는 서로의 허구적 상태를 인지하는 가운데, 과거의 기억을 잊게 해줄 대상으로서 서로를 선택한 것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자연의 상태가 아니라 시스템의 규율 하에서 만나고 말았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시스템 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진실한 사랑을 얻기 위한 자연적인 만남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정신 장애 환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초반부 의사가 말한 “기억을 되찾은 환자도 없고요.”라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 대사는 기억을 앓는 사람 중에 그 기억을 되찾고 싶은 ’의지‘가 있는 환자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더 중요하게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랑을 통한 기억의 대체 가능성이 숙명적으로 희박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때문에 작중 전염병이 된 기억상실증의 끝없는 확산은 아픈 기억을 속으로만 끙끙 앓던 사람들의 처량한 자기 고백의 표출처럼 보인다.


그는 정녕 망각을 포기한 걸까


알리스가 마지막으로 수행한 프로그램의 미션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증환자를 찾아 함께 시간을 보내다 죽게 되면 장례식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라는 것이다. 알리스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아내를 둔 어느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기억을 잃은 것에 안타까워하지만 알리스는 오히려 남편이 죽어도 그와 관련된 기억을 잊을 필요가 없으니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알리스에게 할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이 죽은 아내를, 그리고 할아버지의 아내는 알리스 자신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알리스는 할아버지의 아내처럼 기억을 잃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고 할아버지가 죽자 알리스는 장례식을 찾아 먼발치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 2인칭의 죽음이 연상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알리스 아내의 죽음이다. 다시 한번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게 된 알리스는 도저히 망각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야말로 가능성의 차단. 이때 그에게 망각의 불가능성을 깊이 각인시키는 주체는 정부의 구제 시스템이다. 망각의 욕구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이 곡진한 노력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기억이 언제나 망각보다 앞서는 아름다운 개념일까. 알리스는 망각의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깨닫고 본가로 돌아간다.



과일 가게에서 사과가 기억력에 좋다는 점원의 말에 알리스는 봉투에 담았던 사과를 전부 오렌지로 바꾸었었다. 그런 그가 본가에 돌아오자 다시 사과를 먹기 시작한다. 드디어 알리스는 상실의 슬픔에서 초연하여, 망각의 욕망을 버리고 죽은 아내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그가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참지 못했던 것은 죽은 할아버지를 잊지 못해 서럽게 우는 그의 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이때 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아웃 포커스로 처리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사과를 다시 먹는 것은 망각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에 맞서는 방식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망각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선명히 떠올려 보는 것. 그렇게 기억이 불러오는 감정의 농도를 묽게 만들고 그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 그렇다면 어떤 기억을 떠올릴 것인가. 알리스는 오래돼 말라비틀어진 사과 대신 상대적으로 신선한 사과를 고른 뒤, 썩은 부위를 도려낸다. 그에겐 아픈 기억까지 떠올릴 용기가 없다. 그는 죽은 아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플>의 프레임을 감싸는 모든 공기는 희망 섞인 그리움이 아니라 체념에 가까운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알리스에게 기억상실증에 걸릴 확실한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기회를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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