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보통의 상식 수준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싸이코 살인마 경철의 무자비한 토막 살인으로 사랑하는 예비 신부를 잃었다. 그의 고통과 분노의 크기를 감히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 그런 그가 분노를 표출하고자 할 때 그에게 비판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설사 분노 표출 방식이 정당하지 못한 사적 정의의 실현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심정에 대한 공감과는 별개로 정당한 분노와 그것의 실제 표출 사이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윤리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가 실패한 영화인 이유는 분리되어서는 안 될 의제-분노와 윤리-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감독은 폭력적인 복수의 과정과 그로 인한 신체 훼손의 이미지를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와 쾌락을 경험하도록 강요한다. 이것을 단순히 폭력의 극단적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종국에 영화는 지독한 복수의 과정 끝에 남는 공허함과 무력감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분노와 그 표출 사이에 필요한 것
분노의 정당성 자체는 사실 논할 필요가 없다. 분노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의 영역에 속한다. 감정이란 본디 감각체계에 의해 수동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마저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의 영역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감정을 느낀 순간과 그것을 표출하는 데까지는 얼마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수현은 정당한 분노를 느끼고 있지만 그가 싸이코 살인마 경철에게 복수하는 방식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다. 수현은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철을 찾아내 그를 완전히 제압한다. 하지만 수현은 경철을 의도적으로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 그는 경철을 잡았다 놓아주는 방식으로 복수를 진행함으로써 참상의 크기를 키워간다. 이에 대해 김지운 감독은 이동진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잡았다가 놓아주는 방식을 반복함으로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던 인간이 스스로가 먹잇감이 되어 살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려는 게 수현의 의도였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점점 배가되는 공포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고요.” 감독은 수현의 복수 방식과 그 동기에 대해 변호하려 애쓰지만 나는 이 말에 전혀 수긍할 수가 없다. 수현이 결말에 이르러 감독이 언급한 태초의 의도를 대사로 설명하긴 하지만 그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그는 그저 자신의 분노 게이지를 충당하기 위한 쾌락적 형벌을 자행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경철처럼 끔찍한 악마로 묘사되는 그의 친구 태주는 수현을 사냥할 때의 짜릿한 쾌감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이 수식에 입각해서 수현이 경철을 잡았다 풀어주는 모든 장면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매 장면마다 수현은 언제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경철을 잡았다 놓아줌으로써 피해자들을 양산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경철에게 극심한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을 단 한 번도 걱정하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첫 번째 피해자는 허름한 병원의 여자 간호사다.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좁은 방 안에서 경철의 성폭력 피해자가 되고 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수현은 경철을 제압해 아킬레스건을 끊지만 이미 발생하고 만 폭력의 잔재는 다시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수현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평생의 상처를 입게 된 간호사에게 경철을 치료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그녀에게 어떠한 사과나 위로도 하지 않았다. 이 대목부터 수현에게는 ‘윤리’라는 덕목이 제거되어 있는 듯 보인다. 김지운 감독의 의도처럼 수현이 경철에게 행하는 반복적인 복수의 과정이 나름의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익 추구에 해당하는 그 복수를 위해 피해자를 양산하는 방식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이후, 수현의 잘못된 판단은 간호사뿐만 아니라 약사, 택시 기사, 장 반장, 세연 등의 숱한 피해자들을 만든다. 그런 그가 결말에 이르러 돌연 회한과 허무의 눈물을 흘릴 때의 당혹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 장면에서 김지운 감독은 그가 던지고자 하는 주제 의식-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자의 회환-의 진심과 깊이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앞선 장면들과 상반되는 수현의 후회와 반성, 그리고 허무한 깨달음은 그저 주제 의식을 위해 뒤늦게 배치한 인위적 구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결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수현이 ‘윤리적인’ 악마로 묘사됐어야 했다.
악마는 누구인가
작중 악마로 묘사되는 것은 경철과 수현이다. 다만, 영화에서 묘사하는 악마란 ‘싸이코’라는 단어로 축약되는,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악마와 싸이코의 연결이 어떻게 자연스레 성립될 수 있는지에 대해 영화는 어떠한 답도 주지 않는다. 경철은 중반부 펜션 시퀀스에서 드러나듯 세상을 바꿔보려 했던 무장단체 출신이다. ‘무장단체 출신의 싸이코 살인마’라는 설정은 일순 실제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김지운 감독이 직접 언급했듯 경철은 90년대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존파를 참고해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경철은 특별한 이유 때문에 상대를 죽이거나 강간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경철과 지존파의 연결은 지나친 비약이다. 지존파는 자본주의의 이면을 목격하고 이에 대한 반항이라는 신념으로 잔혹한 폭력을 자행했다. 그들의 행동이 용납될 수 없는 악행인 건 사실이지만 최소한 그들에게 신념은 존재했다. 반면, 경철은 별다른 신념 없이 그저 본능적인 폭력성을 발현하는 일차원적인 인물이다. 지존파의 행동은 용납될 수는 없어도 이해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경철의 행동은 용납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철과 지존파의 거친 연결은 김지운 감독이 치열한 고민의 결론으로서, 악마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는 폭력성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이 결론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 고민 자체를 유보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의심은 수현을 악마로 묘사하는 방식에서 더 두드러진다. 경철이 이미 완성된 악마라면 수현은 악마가 되어가는 자다. 다만, 영화에서 수현이 악마가 되어가는 지점은 다소 모호하다. 그는 아내가 경철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 사실상 바로 악마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경철을 잡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후에 경철을 잡았다 놓아주는 과정까지, 눈에 보이는 내면의 토론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 그는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바로 경철에게 잔혹한 복수의 과정을 선물한다. 한 마디로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 악마성이란 어떻게 발현되는 것이며 그 속성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멸과 허무로 이끄는지에 대한 면밀한 통찰 없이 그저 싸이코적인 잔혹성의 묘사만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신체를 훼손하고 고통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폭력 행사 방식이 악마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악마성을 단순히 물리적 폭력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편협한 사고일 뿐이다.
수많은 유대인 학살을 종용했던 나치친위대 아이히만에 대한 보고서로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녀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유대인을 학살할 악마적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는 그저 상관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아이히만이 그토록 잔인한 유대인 학살을 집행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상관의 명령이 부당한 것인지 판별하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서 이러한 철학적인 고찰까지 바란 것은 아니다. 다만, 작품의 제목이 ‘악마를 보았다’인 만큼 잔혹한 물리적 폭력이라는 일차원적인 답이 아니라 더 새롭고 신선한 악마에 대한 통찰이 있기를 바랐다. 그것도 힘들다면 적어도 <케빈에 대하여>처럼 이해할 수 없는 악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허무함과 무기력에 대한 통찰 정도는 제시되길 바랐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오로지 잔혹한 스펙타클에 천착하는 영화를 만들고 말았다.
장르적 쾌감에 몰두한 나머지
신체 훼손과 다량의 피, 잔혹한 살인에 이르는 고어 영화로서의 장르적 쾌감은 탁월한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적 쾌감에 몰두한 나머지 감독은 작위적인 장면들을 여럿 탄생시킨다. 가장 의아한 장면 중 하나는 수현에게서 풀려난 경철이 산 속에서 또 다른 살인마들이 타고 있는 택시를 타게 되는 장면이다. 해당 장면의 화면 구성이나 배우들의 연기와 합은 아주 탁월하게 표현되었다.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는 차, 요동치며 움직이는 카메라, 극악무도한 난도질까지. 고어 영화로서 갖춰야 할 숨 막히는 서스펜스와 피의 정화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잔혹한 장면이 왜 이 타이밍에 들어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바로 전 장면에서 수현에게 압도적으로 제압되기는 하였으나 우리는 이미 경철이 얼마나 잔인하고 강한 인물인지 알고 있다. 살려달라는 말에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오히려 짜릿함을 느껴 바로 숨통을 끊어버리고는 그것도 모자라 신체를 토막 내어 죽이지 않았나. 초반부에 제시된 이 장면은 그가 얼마나 잔인한 싸이코인지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택시 장면은 연출과 연기의 탁월함과는 별개로 내러티브 상 크게 의미 없는 인위적인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장르적인 쾌감에 매진한다는 느낌을 받은 가장 큰 대목은 중반부의 펜션 시퀀스다.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그 공간은 다소 생뚱맞은 타이밍에 등장한다. 그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외진 곳에 위치한 펜션은 다소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곳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해치우고 세정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키는 경철의 모습은 남을 통제하려드는 그의 본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세정과의 강제 섹스신은 앞서 이미 본 적 있는 경철의 잘못된 성의식과 폭력성을 구태여 다시 드러낸다. 도대체 이 장면이 이 타이밍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긴장감 넘치는 액션 등 가장 장르적인 색채가 짙게 묻어 있는 이 펜션 시퀀스는 영화의 중반부를 다소 넘은 지점에 배치되어 있다. 이 시간대는 결말부로 넘어가기 전, 작품의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펜션 시퀀스는 주제 의식과는 거리가 먼 장르적인 쾌감만을 전달하는 데에 그친다. 감독이 생각하는 악마란 무엇이며 그 본성은 무엇인지, 정확한 대답이 힘들다면 그 고민의 흔적이라도 얼마큼 드러냈어야 했다. 이것들 없이 스펙타클만이 전시된 시퀀스는 공허할 뿐이다.
끊임없는 복수의 과정에서 행해지는 폭력 묘사가 영화의 핵심이다 보니 주변 인물들은 모두 죽어 있는 듯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특히, 평소 믿고 따르는 형님인 장 반장이 경철에게 반죽음 상태로 발견되고 그의 딸인 세연이 경철에게 잡혀간 상황에서 오 과장은 수현에게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오 과장은 분명 장 반장이 잘못되면 각오하라며 수현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음에도 사단이 벌어지고 난 뒤, 수현이 현장에 찾아오자 너무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수현의 목을 졸라도 모자를 판에 오 과장은 그의 얼굴을 한 대 때리는 것으로 모든 분노를 표출하고는 그가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준다. 이는 작품 전반의 사실적인 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 순간이다. 아마 경철과 수현의 복수 과정에만 천착한 탓에 주위 인물들이 두 주인공의 사건에 개입하게 만들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위적인 구성은 사실적인 영화를 찍으려던 감독의 계획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번 영화를 리얼리스트의 눈으로 만든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장르적 느낌을 강화시킨 게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김지운 감독의 생각보다 <악마를 보았다>는 훨씬 더 장르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한 영화가 장르적 쾌감에 종속되어버릴 때 나타나는 끔직한 결과들이 어떠한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장르적인 쾌감은 문자 그대로 ‘장르’ 안에서 매우 핵심적이고 중요한 감각이긴 하지만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장르로 완전히 치환되지 않을 시에는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장르적 쾌감은 살인과 성적 학대라는 끔찍한 폭력과 분노 표출의 정당성 문제와 결부되어 질 때 다소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윤리의 문제가 들어가야 함은 물론이고 그 쾌감의 방향이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감독은 장르적 쾌감 이전에, 그리고 영화 이전에,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이 충실히 이뤄진다면, 설사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할지라도 그 고민의 과정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