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분명 끔찍한 호러 영화다. 외간상 평범해 보이는 사이코 아버지 밑에서 병약한 모자가 벌이는 악착같은 탈출 서사가 호러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샤이닝>의 현실 버전이라고나 할까. 차이점은, <샤이닝>이 귀신 들린 집이라는 외부적 공간에 의해 내면의 악마성이 점차 표출되는 이야기인 데 반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법과 사회라는 외부, 그리고 그것에 요구받는 품위에 의해 내부의 악마성이 사정없이 억압받다 마침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는 점이다.
가정법원에서 소년 줄리앙은 아버지 앙투안에 대해 영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통해) 말한다. 그러나 내밀한 사정을 알 리 없는 판사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판단을 보류한다. 과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이 미스터리는 머지않아 밝혀지지만, 세상 어느 것보다 은밀히 작동하는 가족이라는 비밀 공동체의 신비감을 일깨운다. 이 내밀한 사적 영역을 해부할 수 있는 자들은 그 구성원들밖에 없다. 법이나 제도 따위는 물론이거니와 친인척, 그리고 친지 역시 여기에 끼어들 수 없다.
그렇기에 비극은 잉태된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가련한 모자의 만남은 그 자체로 폭력의 점화를 앞둔 지독한 서스펜스의 시작이며, 이별은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두 번째 서스펜스의 전조다. 이 만남과 이별의 과정은 그야말로 모자의 숨통을 끊어버릴 지경에 이르는데, 흥미롭게도 그들에게 가하는 앙투안의 물리적 폭력은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그가 휘두른 주먹은 줄리앙의 안면이 아니라 좌석의 머리받침대로 향할 뿐이며, 순간적으로 미리암의 목을 조를 때에도 처제에게 즉각 제지당한다. 그러나 부재한 물리적 폭력에도 불구하고 모자가 느끼는 공포는 역겨운 식인 괴물이나 사악한 연쇄살인마를 만났을 때와 차이가 없다. 그들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공기다. 가정 폭력의 진정한 무서움은 어떤 잔혹한 사건이 끝내 일어나버리고 말 것 같은, 그러나 그에 저항할 힘은 부여받지 못해 종국에 질식할 수밖에 없는 당혹스런 무력감에 있다.
그 공기로부터, 그리고 언제 행해질지 모를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최후의 보루는 ‘문’이다. 하지만 웃기게도 문은 위협의 정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증폭기이기도 하다. <샤이닝>에서 광인이 된 잭이 소름끼치게 웃으며 도끼로 문을 내려찍었던 것처럼, 스스로 광기를 드러낸 앙투안은 결말부에서 장총을 갈겨대며 문에 구멍을 뚫는다. 상대에 대한 통제권을 자기존재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문은 애초에 열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부서져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문은 시종일관 단절과 유대의 중간 지대를 상징하는 소품으로 활용된다. 미리암과 아이들이 새로 살게 될 집을 구경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열린 방문으로 보이는 휑한 공간을 비추는 데 정신이 팔려 인물들을 계속해서 밖으로 밀어낸다. 그렇게 줄리앙은 카메라 바로 앞에, 조세핀은 저 너머 흐릿한 화면에, 미리암은 프레임 바깥의 세계에 자리 잡는다. 그들은, 모든 문이 열려 있어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이는 집 내부 풍경과 달리 그들이 확보한 명확한 경계만큼이나 심리적으로 떨어져 있다. 그들은 하나의 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세계를 벗어나 다른 소우주로 진입하길 꿈꾸는 독립체들이다.
그렇다면 앙투안이 부서트린 문은 단절을 의미할까, 유대를 의미할까. 그전에 이것은 과연 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일까. 문의 존재론은 열린 상태에 있는 걸까, 닫힌 상태에 있는 걸까. 이 부서진 문은 다시 한 번 모호한 중간값으로 남겨진다. 그러나 여기에, 경찰을 호출해 미리암을 위기에서 구해준 앞집 할머니의 문이 포개지면 어떨까. 그들 사이에 마련된 이중의 문. 아니, 가정이라는 둘레에 그어진 넘을 수 없는 가상선. 이때 문을 닫는 주체가 미리암과 줄리앙이 아니라 그들을 구한 경찰과 앞집 할머니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경찰로 표상되는 시스템과 이웃으로 대변되는 도덕적 책무의 분명한 한계. 그들은 약간의 도움을 줄 뿐이다. 굳게 잠긴 이중의 문 너머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일은 온전히 피해자들의 몫이다. 무엇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다.
이 비극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진짜 비극은 다른 데 있다. 폭력의 가장 저질스러운 특성, 그것의 대물림이다. 이는 피해자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연 속으로 점차 침투해 들어오며 무의식의 균열을 일으킨다. 우리는 줄리앙이, 이사할 집을 구경하는 장면에서 그의 누나 조세핀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조세핀이 더블 침대를 둘 수 있어 넓은 방을 차지하고 싶다고 말하자, 줄리앙은 남자 친구와 벌써 잠도 같이 자냐며 비아냥댄다. 이 잠재적인 폭력성을 두고 조세핀은 “(앙투안과) 꼭 빼닮았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쏟아낸다. 아직 자아정체성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현재의 줄리앙에게 저 짧은 대사는 한낱 공허한 투정 정도로 들리겠지만,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이 날의 대화는 그의 생 전체를 짓누를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남을지 모른다. 폭력의 피해자가 극도의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순간은 어느덧 자신이 폭력의 가해자가 되었음을 자각하게 되는 때 아닌가. 아니면 줄리앙은 불가역적으로 증대되는 잠재적 폭력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2의 앙투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앙투안도 처음에는 그의 가부장으로부터 학대받았을 뿐인 무고한 피해자이지 않았나.
한편, 미리암의 비전 역시 최소 줄리앙만큼 암울하다. ‘그래서 결국 그녀 곁에는 누가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을 두고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앙투안이 만행을 저지르는 가장 극악한 공포의 순간에 조세핀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이미 가족이라는 퇴행적 세계에서 탈출한 상태다. 그녀에게 혐오의 대상은 앙투안이 아니라 ‘가족’ 자체다. 그녀는 위에 언급한 바 있는 줄리앙과의 다툼 이후, 이모를 찾아 “엄마가 미워요.”라며 한탄한다. 그녀는 앙투안은 물론이거니와 줄리앙과 미리암 모두를 혐오하는 아나키스트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잠재적 폭력성에 잠식되기 시작한 줄리앙은 조세핀의 나이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미리암 곁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남아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녀 곁을 지키는 건 차라리 도처에 매복해 있는, 앙투안이라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아닐까.
만약 과거에 가정 폭력을 경험해 본 적 있거나, 현재 그 고통 속에 여전히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영화가 선사하는 놀라운 현실감은 역겨웠던 과거의 경험을 끝내 상기시키는 원동력이면서, 그들의 삶에 가닿으려는 어떤 치열한 노력의 흔적이기도 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본다는 것은 상처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기꺼이 위무하려는 한 예술가와의 조우를 뜻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남기는 유일한 희망이자 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