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스텔로 Jun 08. 2023

<우주 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우주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하류층 반영웅

 

참 이상한 결말이다. 외계인의 습격을 받은 듯 잔해와 낙엽만이 가득한 보스턴 거리에 레이가 딸을 안은 채 쓸쓸히 걷고 있다. 그런데 그의 처량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그토록 찾았던 전처는 집에서 평안히 걸어 나온다. 외계인과 싸우겠다며 달려나가 화염 속에 자취를 감춘 아들 로비도 그곳에서 별안간 튀어나온다. 외계인과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이의 처절한 생존기는 그들의 알 수 없는 평안 앞에서 참으로 허망하고 우스운 일이 돼버린다. 말하자면 스필버그는 이 대목에서 영화의 근간을 형성하던 사실성을 느닷없이 전복시킨다. 여기엔 어떠한 현실적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강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조도다. 스필버그는 사물의 하이라이트가 하얗게 떠서 없어질 정도로 과다한 광량을 사용함으로써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렇다면 이 비현실적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장면의 주인공이 영화 전체의 주인공인 레이의 비극적 상상 혹은 악몽을 의미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게 비극적 상상과 악몽을 떠올리게 한 걸까.



<우주 전쟁>에는 보통의 재난영화와 달리 영웅이 없다. 서사를 견인하는 주체인 레이는 스필버그 영화의 모든 주인공을 통틀어서 가장 마음을 주기 어려운 비호감 캐릭터다. 어린 소년처럼 자식을 이겨 먹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들에게 지나치게 무심하다. 그렇다고 천재 과학자라거나 고위 관직에 있는 상류층 인물도 아니라서 관객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이러한 반영웅적 면모와 하층민이라는 초라한 지위는 그가 외계인의 위협을 뚫고서라도 기필코 가닿고자 하는 전처의 세계, 즉 상류층의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영화에서 레이와 전처가 같은 장면에 등장하는 대목은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그녀가 레이의 집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는 장면뿐이다. 말하자면 상류층은 쉽게 하류층의 세계에 닿을 수 있지만, 하류층은 결코 상류층의 세계에 닿을 수 없다. 그 사이는 끔찍한 외계인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살상 기계, 그리고 정신 나간 사람들로 가득하다. 요컨대 <우주 전쟁>이 자아내는 실질적 위협은 외계인의 습격이 아니라 두 계층 사이의 끔찍한 불화다. 우리가 매력적이지 않은 비호감 캐릭터 레이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건 그의 계층적 무력감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계층적 무력감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절망감이 표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는 로비의 귀환을 통해 은밀히 암시된다. 그는 분명 외계인과 싸우겠다며 언덕을 뛰어가다 화염 속에 사라졌었다. 그런 그가 주검으로 발견되기는커녕 머나먼 보스턴 집에서 평온한 얼굴로 나타난다. 돌이켜보면 로비는 누구보다 레이를 혐오하여 줄곧 어머니와 살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그러니 느닷없는 로비의 귀환은 레이가 자기 대신 전처와 살려고 했던 로비의 바람을 끔찍한 상상을 통해 대리적으로 실현시켜주는 것이다. 조금 모자라긴 해도 레이는 작중 대사에서 언급되었듯 로비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다.


스펙타클의 윤리



레이는 하늘에 소용돌이가 생기고 같은 곳에 벼락이 계속 내려치는 광경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아이처럼 해맑게 즐긴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는 건 그 위력이 점차 강화되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러한 구도는 교회 앞에서 트라이포드가 지반을 뚫고 올라올 때 다시 반복된다. 사람들은 생경한 미지의 기계가 산출하는 매혹 앞에서 넋을 잃는다. 그들은 일종의 황홀경을 경험하는 듯 무척 신이 나 있다. 그러다 잠시 후, 외계인이 조작하는 이 살상 기계가 그곳에 몰린 구경꾼들을 잔혹하게 죽이기 시작하면서 재난은 시작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공식이 성립된다. 스펙타클은 매혹적이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높은 확률로 죽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는 행위다.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숨어서 보거나, 눈을 가려야만 한다.


외계인이 타고 다니는 살상 기계 ‘트라이포드’는 그 명칭과 기능, 그리고 형태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삼각대와 카메라를 동시에 연상시킨다. 구분하자면 세 개짜리 다리는 삼각대를, 본체는 카메라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트라이포드는 압도적인 매혹을 뽐내는 스펙타클 자체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끔찍한 기계는 영화라는 매체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스펙타클로 구동되는 복합 기계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둘러싼 군중, 달리 말하면 관객이 트라이포드를 보는 순간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대개 보는 자는 권력을 쥔 자이고, 보이는 자는 그에 지배를 당하지만, <우주 전쟁>에서 이 시선의 권력 관계는 완전히 전복된다. 보는 자는 죽고, 보이는 자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파괴하며 시선의 독점권을 확보한다. 한마디로 스펙타클로서의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빼앗고 역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폭력의 주체가 된다.


스펙타클에 대한 위와 같은 경고는 조던 필이 <놉>에서 스펙타클을 다루는 방식과 같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된 시기를 고려하면 <우주 전쟁>을 단순히 영화와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스펙타클의 함정을 꼬집는 것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9‧11 테러 이후, 이 끔찍한 스펙타클을 보도하는 영상 매체에 대한 스필버그의 통렬한 성찰을 반영하는 것이다. 테러의 장면은 필연적으로 스펙타클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의 매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심어 놓는다. 때문에 스필버그는 이 죽음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전시를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의 나머지 분량을 채운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없도록 인물이 눈을 가리는 행위를 특정 대목마다 새겨넣는다. 딸이 강에 떠다니는 시체들을 보지 못하도록 레이가 그녀의 눈을 가리는 장면과 지하실에 은둔 중인 호전광을 살해하는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헝겊으로 딸의 눈을 가리는 장면이 그렇다. 이 논쟁에 관한 한 스필버그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다. 테러라는 끔찍한 스펙타클을 보지 않는 것. 그것의 매혹을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그리고 최선의 윤리적 행동이라는 것을 스필버그는 타협 없이 끝까지 관철시킨다. <우주 전쟁>은 스펙타클의 윤리 말할 때 끊임없이 소환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이전 04화 <업>, 픽사가 정의하는 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