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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4. 2023

<케빈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



희대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를 돌이켜보자. 우리는 그 가해자를 어떤 유형의 인간으로 규정해 왔는가. 분석관들은 흔히 가해자의 악마성을 후천적 환경의 영향 또는 선천적 결함의 이분법적 잣대로 설명한다. 폭력적이고 불우한 외적 환경의 점층적 부하에서 길러진 공격성이나 공감 능력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퇴화한 전두엽의 탄생이 일반적으로 인간의 악마성이 발현되는 두 가지 큰 원인으로 거론된다. 모두 합리적이고 타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어떤 행위 또는 ‘악마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과학적 근거와 추론으로 분석한 이론적 해석에 불과하다. 정작 어떤 이유로든 악마성을 갖춘 사람에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에 대해선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만약 이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케빈에 대하여>는 에바의 뒤틀린 모성애로 인해 케빈이라는 악이 탄생하게 된 흔하디흔한 이야기로 전락해버린다. 물론 에바의 뒤틀린 모성과 강압적인 양육 방식이 케빈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그의 악마성을 키웠을 것이라는 시각이 아예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에바는 애초에 케빈을 낳을 생각이 없었던 데다 출산 이후, 모험가로서의 꿈과 행복이 다 사라졌다고 믿는다. 급기야 그녀는 케빈에게 “엄마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라는 가혹한 대사까지 퍼붓는다. 하지만 <케빈에 대하여>는 시시한 일반적 결론을 도출하는 여느 공산품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케빈이 희대의 살인자가 된 경위를 후천적 환경 혹은 선천적 결함의 인과와 논리 속에 풀어내는 데 애초에 관심이 없다.


불가해한 존재로서의 케빈


실리아의 등장은 케빈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악이 아님을 입증하는 귀납적 사례 중 하나다. 작중에 묘사되는 실리아의 탄생은 케빈의 탄생과 별다를 게 없다. 에바는 배가 눈에 띄게 튀어나올 때까지 남편 눈치를 보면서 그에게 임신 사실을 숨겼다. 남편은 예상치 못한 임신에 자신에게 왜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냐며 그녀에게 화를 낸다. 의도하지 않았던 임신, 그리고 사랑보다는 의무감에 충실한 출산. 에바에게 실리아의 탄생은 케빈의 경우처럼 비극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실리아를 출산하고 난 이후의 상황이 괄호 쳐져 있는 것은 그래서 이상한 공백이 아니다. 그녀는 케빈에게 그랬던 것처럼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적절한 수준의 육아를 제공했을 것이다. 핵심은 실리아와 케빈이 동일한 조건 하에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닌 폭력성은 상이하게 도출되었다. 실리아는 ‘폭력’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한다. 자기 과자를 아빠에게 선뜻 건네고 케빈의 짓궂은 괴롭힘에 화 한 번 내지 않는다. 물론 실리아가 케빈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에바의 잘못된 모성과 양육 방식이 희대의 살인자를 만드는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에바에 대한 책임론을 다소 헐겁게 만들어 주는 실비아의 존재는 애초에 감독이 악의 생성 과정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방증하는 셈이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형식상의 특징은 비선형적 서사 구조다. 영화는 파편화 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처연한 상황이 크게 구별되지 않고 서로 섞여 전개된다. 과거의 어떤 기억을 연상시킬 만한 상황이 발생하면 에바는 여지없이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산발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비자발적 기억의 흐름은 때로 산만해 보일 정도지만 감독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비선형적 서사 구조를 고집한다.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영화의 핵심적인 행위 중 하나는 에바가 고군분투하며 집에 칠해진 붉은 페인트를 씻어내는 것이다. 이 페인트는 붉은 색감과 벽에 응고되어 잘 떨어지지 않는 특성 때문에 자연스레 피를 연상시킨다. 케빈이 살해한 사람들이 흘렸을 핏물 말이다. 에바는 벽과 바닥, 차에 붙은 핏물까지 미친 듯이 닦아낸다. 그 핏물은 닦임과 동시에 그녀의 몸을 붉게 물들인다. 이때, 그녀가 피를 닦아내는 행위는 속죄하고 구원 받으려는 처절하고도 명백한 몸부림이 된다. 영화의 도입부, 그녀는 붉은 토마토 축제의 한 가운데에서 낯선 사람들에 의해 성스러운 십자가의 형상처럼 들려 있다. 이 이미지가 그녀의 편집된 기억 속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 것은 과연 우연일까. 영화는 시작부터 에바를 죄책감이라는 표면이 아니라 속죄와 구원이라는 심연의 내피를 닦아야만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다만, 속죄가 가능하려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죄를 인정하고 뉘우칠 수 있다. 때문에 그녀는 가능한 한 계속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플래시백으로 제공되는 과거의 정보들은 에바가 판별한 자신의 죄를 차례로 나열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를 그녀의 뒤틀린 모성애 때문에 케빈이 악마로 만들어졌음을 증명하는 사례 모음집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독은 시작된다. 만약 에바로 인해 케빈이 걷잡을 수 없는 희대의 악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면 그녀의 잘못이 케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선형적 전개 과정 속에서 진득하게 관찰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형식은 곧 주제를 의미한다. 거듭 말하지만 린 램지 감독은 애초에 악의 생성 과정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탐구 대상 자체가 아니라 탐구 대상에 닿으려는 노력의 과정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 에바가 자신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태-케빈의 본질-를 이해하고자 기억의 파편들을 긁어모으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그녀는 속죄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 영화 제목이 <에바에 대하여>가 아니라 <케빈에 대하여>인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남는 건 케빈이 품고 있던 어떤 진실이 아니라 지독한 탐구의 과정뿐이다. 영화의 첫 번째 쇼트가 진실을 숨기고 있는 커튼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케빈을 후천적 영향이 아니라 선천적 결함을 갖고 태어난, 타고난 악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시 모호하다. 작중에 케빈의 선천적 결함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전무하다. 설사 그럴 만한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케빈의 퇴화한 전두엽이 프레임 안에 직접 드러나거나 그에 대한 전문가의 소견이 제시되지 않는 한, 우리는 케빈이 선천적 결함을 가진 존재인지 알 방도가 없다. 그가 실생활에서 부족한 공감 능력으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존재하는 곳은 오로지 에바가 존재하는 곳 근처다. 우리는 케빈이 에바를 떠난 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본 적이 없다. 물론 작중 케빈의 모든 행동들에 그럴 듯한 이유를 갖다 붙일 순 있다. 그가 행한 행동의 이유가 무한한 가능성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은 동시에 그 무엇도 확실히 설명할 수 없는 무의미를 뜻한다. 케빈의 주위에는 모호한 행동 분석만이 유령처럼 맴돌 뿐이다. 그를 둘러싼 명확한 진실은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다. 때문에 그 누구도 함부로 케빈을 규정할 수 없다. 어쩌면 케빈은 인간 따위의 사고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로서 실존하는지도 모른다.


탐구 과정 끝에 남는 것


집과 차에 묻은 붉은 페인트를 다 씻어내고 에바는 다시 케빈을 찾는다. 이제 에바는 그간의 긴 회상을 통해 자기 잘못을 정리하였다. 이제 그것이 맞는지 확인할 차례다. 면회실 의자에 마주 앉은 그녀는 케빈에게 “왜 그랬니?”라고 묻는다. 긴 시간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던 그녀가 원한 답은 일반적 해결 방법인 모성에 대한 갈구였을지 모른다. 엄마에게 사랑받기 위해 비극을 저질렀다는 식의 답변 말이다. 하지만 케빈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라는 의문의 말을 남기는 것으로 답변을 마친다. 이 대답으로 케빈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어떤 상태로 남는다. 이때 복기시켜야 할 것은 “이유 따윈 없어, 그게 중요해”라는 작중 케빈의 대사다. 행동에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거의 그의 말은 결말부에 이르러 행동에 원인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애매한 뉘앙스로 수정된다. 이는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자각하고 있지 못함을 드러내는 처연한 고백이다. 그는 그 누구도(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서 실존한다. 이로써 악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색해지며 에바의 무력감은 배가된다. 그녀는 이제 완전한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완전한 구원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면회가 끝나고 케빈을 안아주지만 그 포옹에는 따뜻함이나 연민의 감정이 묻어 있지 않다. 케빈의 머리에 놓인 그녀의 손은 그의 머리를 감쌌다기보다 머리에 ‘올려놓았다’ 혹은 ‘갖다 대었다’에 더 가깝다. 기계적인 포옹과 무표정이 그 순간의 에바를 수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결국 그녀는 케빈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종국에 구원받지 못했다. 린 램지 감독은 여타 감독들과 달리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했다고 말하는 기만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대한 그 본질에 닿으려 노력하는 것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케빈에 대하여>가 현실적이면서 또한 탁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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