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머신 위에 머물던 육신이 드넓은 길가로 영역을 넓혀 위협적인 자동차 소리에 잠식될 때, 나는 이미 죽음의 순간이 등장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이토록 일순 화면을 휩쓸고 지나갈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왜 미셸 프랑코는 이 충격적인 충돌 장면을 결말로 채택해야 했을까. 이때 상기해야 할 것은 화면의 내적 공간을 내내 물들이고 있던 죽음의 감각이 충돌 이미지로 돌연 전면화된 다음 무심하게 화면 밖으로 멀리 내쫓긴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같은 속도로 계속 후진하고, 차도의 차량들은 그저 제 갈 길만 막지 말라는 듯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고는 유유히 그곳을 떠난다. 그러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충돌 이미지의 급작스런 제시는 그 죽음의 충돌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데이비드를 향한 세계의 무관심으로 수렴된다.
공감의 주체에서 객체로
데이비드는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다. 한 가지 이상한 특징은 현재 돌보고 있는 환자를 자신의 실제 가족처럼 여기면서 일종의 역할 놀이를 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 환자 사라는 그의 아내가 되고, 두 번째 환자 존은 그의 친형이 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하지현 교수는 데이비드의 상태를 ‘공감적 과각성’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공감으로 인해 과하게 각성된 상태. 말하자면 데이비드는 과한 공감 능력을 지닌 정신병 환자다. 이때 공감이란 동감과 구별되는 개념임을 명심해야 한다. 동감은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안타까워하지만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정도에 머무는 2인칭적 감정이라면 공감은 직접 타인의 마음이 되어보고 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1인칭적 접근이다. 데이비드는 타인에게 과도한 공감을 보이고 대상에 깊게 몰입함으로써 일시적 해리현상을 겪는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한다. 이 괴물 같은 공감 능력과 그에 따른 특정 대상으로의 몰입은 그가 세계의 무관심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전투적 자세인 것이다.
따라서 데이비드에게는 공감의 대상이 필요하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가 연민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대상이 병약한 심신을 가진 사람인 것은 필연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두 번째 환자였던 존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일자리를 잃은 후, 그의 딸 나디아 윌슨을 찾아간다는 점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데이비드는 어느 집 앞에 주차된 딸의 차를 관망하고 급기야 그 뒤를 쫓는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그는 그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진 않는다. 이와 똑같은 구도로 촬영된 중반부 데이비드의 차량 내부 장면은 푸른 색조로 강조되어 오프닝과 달리 불길하고 우울하다. 이와 연계하여 복기해야 할 장면은 오프닝 장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데이비드가 나디아 윌슨의 페이스북 타임라인 사진을 찾아보는 장면이다. 그때까지 윌슨은 소개된 적이 없기에 해당 장면은 그저 의문의 여인에 대한 전사를 은밀하게 제시하는 것에 머무는 듯 보인다. 하지만 화면의 오른쪽으로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게시글에 좋아요 표시가 하나도 없거나, 없는 것보다 못할 정도로 적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분명 윌슨은 따돌림을 받고 있거나, 친구가 거의 없는 아웃사이더일 것이다. 데이비드가 보기에 윌슨은 신경쇠약 상태이며, 그렇기에 환자로 대할 수 있고 동시에 공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공감의 대상으로 채택된 윌슨이 외려 데이비드의 처량한 처지에 깊이 공감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데이비드는 세계와 분리되지 못하고,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윌슨은 일상적 대화를 나누던 중 “종종 생각해?”라는 무시무시한 질문을 던지며 봉인되어 있던 데이비드의 트라우마를 소환해낸다. 그에게는 말기 질환 환자였던 아들을 존엄사한 아픔이 있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데이비드는 딸의 한 마디로 인해 다시 과거의 트라우마에 붙박인다. 벗어나도 이내 다시 돌아오게 되는 순환의 생리 앞에서 인간은 덧없고 나약한 존재다.
중증 환자로의 전이
영화에서 전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난다. 하나는 마음의 전이, 즉 공감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전이, 더 정확하게는 죽음에 대한 욕망의 전이다. 죽음에 대한 욕망은 그들이 원하는 무관심의 정도와 비례하는데, 데이비드의 경우 마사에게 조력적 자살을 부탁받는 순간부터 그 값이 커지게 된다. 마사의 부탁은 데이비드로 하여금 과거의 트라우마를 재차 연상시킨다. 그런데 데이비드를 향한 세계의 무관심이 바로 이 트라우마 때문에 생성된 것 아닌가. 그는 아들의 존엄사를 감행한 후 한동안 가족과 연을 끊고 혼자 살았으며,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간호사가 되어 환자들을 찾아 다녔다. 그 이후부터 그는 스스로 혼자가 되거나, 환자와 둘이 되기로 결정한다. 사라가 죽고 나서 그녀의 조카가 할 얘기가 있다며 식사를 제안할 때, 그는 통상적인 절차와 달리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차에 오른다. 데이비드는 스스로 세계의 무관심을 자초하는 자다.
돌이켜보면 데이비드가 상대한 환자들 모두 무관심을 스스로 발병시키는 자들이었다. 존은 가족의 관심을 억지로 밀어내며 어떻게든 자신만의 공간을 창출하고, 마사는 암 말기 진단을 받은 사실을 감추며 본인에게 관심이 없는 딸의 방문을 의도적으로 미룬다. 다른 환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관심과 멀어 보이는 사라도 예외는 아니다. 가족과 함께 있는 사라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는 청자의 위치에 머물 뿐이다. 물론 그녀를 비롯한 작중 환자들이 무관심에 방치되었기에 스스로 움츠려드는 것인지, 현실과 분리되길 원했기에 무관심에 침전된 것인지 그 인과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무관심이라는 결핍 상태에 붙박여 있으며, 그곳에서 벗어날 수도 벗어날 생각도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데이비드는 그들을 간병하면서 그들이 분열시키며 크기를 키워 나가는 죽음에 대한 욕망을 서서히 흡수하고 강화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돌보는 환자의 수는 질병의 진행 상태를 나타내는 병기(病期)처럼 보인다. 마사를 존엄사한 후, 네 번째 환자를 맞이하는 순간 데이비드는 3기에서 4기로 넘어간 중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반쯤 열린 창문에 드리운 햇살
이쯤 되면 의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작중 인물들이 겪는 만성적 증상은 실제적 질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심연적 결핍증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보잘 것 없이 쇠약해진 인물들의 육체는 무관심이라는 만성 질환의 육화를 표상하는 상징물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서 이들의 육체가 언제나 죽음으로 수렴된다는 점이다.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처럼 무관심은 육체에 잠입하여 그것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기생충과 숙주가 대개 공멸의 관계에 있는 것과 달리 무관심과 육체의 관계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놓여 있다. (육체의) 죽음은 또 다른 영원적 무관심의 시작인가, 그것의 마침표인가. 영화의 결말에서 데이비드는 신호등이 빨간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차량이 오는 것을 힐끔 쳐다보고도 차도를 건너다 사고를 당한다. 명백히 그의 죽음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이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을 무관심의 소멸로 보았거나, 사후 세계와 현실에 농축된 무관심의 정도가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에게 조력적 자살을 요구한 마사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의 순간부터 현실 바깥에 존재하며,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그 세계로 진입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을 논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미셸 프랑코는 데이비드가 마사에게 조력적 자살을 부탁받는 장면과 이를 행하는 장면 사이에 그가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시킨 아들 댄의 방에 들어가는 장면을 삽입한다. 여기서 1층은 삶을 이어나가는 그의 가족이 사는 현실의 공간이고, 댄의 방이 있는 2층은 정적이 감도는 죽음의 공간이다. 이 사이에 그 둘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인 계단이 놓여 있다.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그 어두운 경계는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의해 치장된다. 이것은 절반의 희망일까, 절반의 절망일까. 영화에서 창문의 계폐에 엄격한 규칙성이 발견되진 않는다. 그러나 따사로운 햇살은 창문의 계폐와 상관없이 시종 그것을 통과해 내부를 환히 비춘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크로닉>은 육체의 죽음이 무관심의 소멸로 이어지기를 절반쯤 소망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