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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5. 2023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독창적인 신파란 무엇인가


독창적인 신파란 무엇인가


최근 몇 년간, 한국 상업 영화를 보면서 갈수록 영화의 퀄리티가 퇴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영화를 그저 하나의 산업으로만 여기는 작가와 감독들, 그리고 제작자들이 어떤 면에서 관객들을 희롱하는 건 아닌지, 좋은 영화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관객들을 현혹시키는 데에만 혈안인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영화를 가벼이 여기는 태도는 이해할 수 있어도 관객을 가벼이 여기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상업성과는 별도로 일정 수준의 독창성과 창의성은 담보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근래 한국 상업 영화들은 안타깝게도 최루적인 공학의 원칙을 따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심은 소위 ‘신파’라 불리는 일종의 주술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형 신파’라는 용어까지 생길 정도로 한국 상업 영화에서 신파는 어느 방향으로든 떼려야 뗄 수 없는 서사와 연출의 핵심 키워드 중에 하나가 되었다. 예전에 연상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신파 논란에 휩싸인 본인의 영화 <반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영화에서 그런 감정적인 장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걸 연출하는 방식에서의 호불호가 존재한다고 본다. 일단 연출자의 입장에서 보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연출할 수밖에 없다가 내 결론이다.”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상업 영화의 경우 적어도 손익분기점은 넘겨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연출자의 어깨를 짓누른다. 도달해야 할 누적관객수를 넘기지 못하는 감독은 단순히 적자를 보는 것을 넘어 영화감독으로서의 행보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연상호 감독의 인터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방식’이 어떻게 신파로 연결되는 건지는 의문이다. 신파는 과잉을 뜻한다. 정확히는 감정의 과잉. 신파 논란이 끊이질 않았던 영화들, 이를 테면 <신과 함께>나 <국제시장>같은 영화들은 슬픔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뜨겁게 가열해 관객들에게 강제로 뜨거움을 느끼게 종용한다. 물을 펄펄 끓여 강제로 주전자를 들이붓는 식이다. 주전자 입구에서 새어나오는 증기만 봐도 우리는 그 안에 든 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음에도 한국의 신파 영화들은 기어이 주전자를 기울여 화상을 입을 때까지 관객들에게 물을 쏟아내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의 과잉 자체가 원론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왕가위 감독은 감정의 과잉을 과장된 음악, 도발적인 촬영 스타일, 그리고 강렬한 색감 등의 형식들과 결부시켜 크나큰 예술적 성취를 이뤘으며 한국 영화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올드보이>는 캐릭터들의 엄청난 에너지와 감정의 팽창, 그리고 화려한 미장센을 서사의 주된 동력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신파에서 중요한 건 감정의 과잉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인 것이다. 신파의 정수는 과잉된 형식들의 기묘한 조화에 있는 법이다.


과잉과 비약의 미스터리 구조



상업 영화가 지향해야 할 신파의 올바른 예시라고 말하기엔 컬트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적어도 현재 한국 영화계가 범하고 있는 신파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영화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한 번만 겪어도 삶에 치명타를 입을 것 같은 불행한 일들을 수없이 겪은 여자가 죽고 난 뒤에야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토록 염원했던 가족의 곁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 그녀가 겪는 일련의 불행들은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사연들은 거칠게 얘기하면 이미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곳을 몇 번이고 다시 타격하는 식의 참담함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오히려 폭력과 자기연민으로 바뀌어 돌아오는 삶의 반복. 이 반복들은 전부 결말부에 위치한 가족으로의 회귀 장면으로 모아진다. 그녀의 비현실적인 희생정신과 숭고함, 그리고 순수함 역시 결말부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데에 기능적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가족에게 다가가는 마지막 그녀의 떨리는 걸음에서 감독의 강압과 그로 인한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한 여자의 잔혹사를 과잉된 감정과 노골적인 동어반복을 통해 담아내지만 여타의 상업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감정적 과잉을 제외하더라도 이 영화는 다양한 형식적 과잉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 형식들이 한 데 모이는 쇼트들은 어느 한 순간도 과잉되지 않은 적이 없다. 과도하게 많은 광량, 저돌적인 카메라 움직임과 불안정한 앵글, 형형색색의 색감 배치가 만들어 내는 부조화, 연극적인 연기 스타일까지. 이 모든 형식적 과장들은 어느 한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이 무질서는 사실 “이건 영화야”라는 최면에 가깝다. 이는 관객과 영화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만들어 내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수시로 들어가는 뮤지컬이나 조잡한 CG, 애니메이션 등의 그래픽도 일시적으로 관객과 영화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영화의 서사가 마츠코의 반복되는 불행에 방점이 찍혀 있음에도 그 불행의 정도에 비해 관객들이 마츠코에게 깊이 연루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조커>에서 뮤지컬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아서 플렉에 대한 관객의 동화 작용을 수시로 끊었던 것처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뮤지컬 장면은 항시 마츠코의 슬픔과 불행의 묘사 뒤에 배치되어 그녀에 대한 관객들의 감정의 농도를 다소 묽게 만들어 준다.



혹자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가부장제에 억압된 여성의 히스테리를 분석하는 데 애쓰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가 뿜어내는 에너지다. 영화에서 마츠코의 일생은 사실상 논리적 비약으로 가득하지만 그녀의 비극이 종국에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건 그녀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계속 넘어져도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그녀는 각종 폭력의 굴레 속에서도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멘탈의 소유자다. 다만, 영화는 그녀의 오뚝이 정신에만 주목하고 싶었는지 그녀가 집을 나간 뒤에 어떻게 첫 번째 남편을 만났으며 그가 죽고 그의 유부남 라이벌과도 헤어진 뒤, 기둥서방과는 왜 만나게 됐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은 전혀 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성적 대상물로 전락하여 돈을 버는 이유 역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러한 논리적 비약은 구멍이 숭숭 뚫린 빈약한 구성으로서 해당 이야기가 미완의 이야기임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 구멍이 관객의 신뢰를 깨뜨리지 않는 이유는 “이건 영화야”라고 속삭이는 과잉된 형식들의 최면적인 외침과 마츠코의 비현실적 에너지가 기묘하게 뒤섞여 서사의 강력한 동력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무질서의 조화는 때로 마츠코의 비극을 희극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 다소 의아한 미스터리 구조가 뒤따른다. 영화는 마츠코의 조카인 쇼가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는 플롯에 기반을 둔다. 밴드 뮤지션의 꿈을 위해 가족을 떠났지만 결국 그 꿈을 포기하고 여자 친구도 잃은 채, 폐인처럼 성인 동영상에 매달려 있는 쇼의 일상은 마츠코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그가 마츠코의 일생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구조는 일순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배가시켜 종국에 꿈의 좌절을 겪은 젊은이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이야기로 흘러갈 것처럼 관객을 속인다. 더불어 미스터리 구조는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궁금증, 즉 후반부에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질문은 크게 세 가지다. 누가 왜 마츠코를 살해하였는가. 쇼의 아버지이자 마츠코의 동생이 말한 그녀의 ‘시시한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시시한 그녀의 삶과 살인으로 인한 죽음은 어떤 연관을 갖는가. 관객은 이 세 가지 궁금증에 대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이야기의 결말을 기다린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만족스런 답을 주는 건 두 번째 질문뿐이다. 나머지는 설명은 되나 탐탁지 않거나 비논리적이다. 그녀를 죽인 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이름 모를 중학생들이고 그 충동을 만들어 낸 건 늦은 시간에 놀지 말고 집에 들어가라는 평범한 잔소리 때문이었다. 이 빈약한 연결은 시시한 인생을 산 마츠코가 언젠가 허무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이었다는 논리를 펼치는 것과 같다. 보통의 미스터리는 서스펜스와 달리 완전무결한, 어떻게 보아도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와야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듯 이 의무 사항을 당당히 배반하고 ‘과장된’ 논리를 들이민다. 이러한 논리적 과장은 위에 언급한 바 있는 과잉된 형식들과 결부되어 종국에 놀라운 시너지를 만들어 낸다.


초라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발단 단계에서 촉발된 어떤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심화되는 갈등의 점진적 증폭을 다룬다. 어떤 원인이 필연적인 결과가 되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세계 속에서 주인공은 벗어날 수 없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 끊임없이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의 간극, 즉 예상과 결과 사이의 간극을 경험하게 된다. 주인공이 예상했던 바가 완전히 다른 결과로 돌아올 때, 관객들은 충격과 통찰을 동시에 얻는다. 그런 점에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다소 뻔하고 반복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편이다. 극 안의 모든 갈등들은 서로 큰 연관성을 맺지 않고 주인공 마츠코에게 상처를 줘 그녀가 마음을 닫게 만드는 일련의 수단으로써 기능한다. 더욱이 결말은 보수적이고 전형적이다. 마츠코는 다시 삶의 의미를 되찾고 불우한 운명과 잔혹한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어선다. 그러다 그녀는 별안간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생을 떠나게 된 그녀는 천국으로 보이는 의문의 하늘을 향해 계단을 올라간다. 마침내 당도한 그곳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가족의 곁이다. 다소 노골적이고 전복적인 이 결말은 여타의 할리우드 영화나 한국 상업 영화의 결말을 떠올리게 한다. 인생의 온갖 풍파를 겪은 주인공이 연을 끊었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들에게 되돌아가는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연을 끊었던 가족에게 반드시 되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설득하는 이야기. 이미 마츠코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최고조에 달했는데 굳이 결말부에 그녀를 죽여 숭고하게 가족을 찾아가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혹여 이 신파적인 결말을 만들기 위해 마츠코를 죽여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결말까지 줄곧 일관되게 유지되었던 이 작품만의 특징-과잉과 비약의 미스터리 구조-은 결말부의 감정적 과잉이 그리 과한 것이 아닌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이미 앞서 설명한 바 있는 여러 과잉된 형식들을 봐왔다. 그리고 마츠코가 뿜어내는 기이한 에너지에 충분히 동화되었다. 그들은 이미 ‘과잉’이라는 감각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다. 그리고 감독은 이런 과잉 상태로 인한 관객들의 피로도를 고려하여 뮤지컬이나 조잡한 CG, 애니메이션 등의 제어 장치를 적절히 활용하였다. 욕조에 물이 흘러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 욕조에 들어갈 사람 부피만큼의 물을 일부러 덜 받아놓는 치밀한 계획과 노력이 있었던 셈이다. 처음부터 세상의 모든 숭고함을 다 끌어안은 주인공에게 관객들이 깊이 동화되도록 설계해 놓고 결말부까지 그 자장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 어떠한 형식적 차별점도 두지 않고 오로지 특정 감정만을 강조하여 감정의 탈진에 이르게 만드는 <신과 함께>나 <국제시장>같은 영화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작품에 신파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작품이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신파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다. 어떤 소재도 어떤 주제도 그 자체만으론 관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기 어렵다. 이미 영화 예술, 더 나아가 이야기 예술은 가늠하기도 어려운 시간을 인간과 함께 해왔고 지금의 관객들은 너무 많은 소재와 이야기를 관습적으로 인지하고 이해하고 있다. 때문에 창작자는 이야기의 구조를 어떻게 직조할 것인가에 대한 ‘스토리텔링’의 문제, 그리고 촬영, 조명, 사운드, 편집, 시각효과와 같은 ‘영화만의 특별한 형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 상업 영화가 ‘한국적 신파’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은 한국의 창작자들이 이러한 형식적 문제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한국 상업 영화에서도 독특하고 창의적인 신파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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