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행위는 지나가는 이미지를 단순히 구경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영화의 어떤 부분은 말해지지 않았으나 말한 것으로 느껴지고, 보인 적 없지만 보았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세계에서 한 번도 실체화되지 않은 것들을 기어이 보려는 행위이며, 그것을 끝내 보았다는 착각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사랑'이라는 대사가 발화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자살' 행위가 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인물의 쓸쓸한 최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표면을 통해 이면을 짐작하고, 심지어 이면을 통해 그 아래 흐르고 있는 무의식의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반투명하다. 표면을 통해 이면과 무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투명하고, 그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영화는 투명성과 불투명성이 빚어내는 모호함의 예술이다. 둘 사이에서 점화된 긴장은 쉽사리 한쪽으로 봉합되지 않고, 심지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이어진다. 영화를 추동하는 힘은 이 긴장으로부터 나온다.
지금까지 봐온 정가영 감독의 영화들은 한없이 투명했다. 수면 아래 저 깊은 곳까지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투명해서 마치 바닷물 자체가 없는 느낌이랄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투명성을 솔직함이라는 미명 하에 MZ 세대의 젊은 감독이 선보일 만한, 또는 으레 그래야 하는 시도로 포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녀의 영화는 솔직하지 않다. 영화에서의 솔직함이란 현실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솔직함은 창작자의 치열한 고민—심각하고 무거운 고민이 아니어도 좋다—의 흔적이 느껴질 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투명성과 불투명성 사이에서 파생된다. 그러나 정가영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의 감정, 하나의 표정, 하나의 말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임에도 그녀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그들이 짓는 표정과 주고받는 대사로 그들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대부분의 장면은 특별한 터닝 포인트 없이 오직 단일한 목표와 감정선을 향해 내달리고, 인물은 보이는 그대로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감정 그대로 대사를 내뱉는다. 장면, 인물, 대사가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으므로 해석의 확장성은 차단되고 관객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관객들은 매력 없는 인물들에게 끌려다니며 시시하고 유치한 장난을 계속 봐줘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처한다.
누군가 정가영 감독에게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을 지어준 듯하다. 여기에 대해선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다미 쇼트와 필로우 쇼트를 구사한다고 오즈 야스지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핸드헬드 카메라로 인물의 뒷모습을 따라다닌다고 다르덴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니듯 고정된 카메라로 길게 인물의 대화를 찍는다고 홍상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공통점이랄 게 거의 없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한 창작자다. 그녀에게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을 지어준 사람은 둘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본 적 없거나, 제대로 본 적 없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