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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Jul 14. 2023

여수에서의 기억


여수에서의 기억



예전에 여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묘한 인상은 아직도 뇌리에 깊게 남아 있는데, 그건 내가 원해서 간 여행이 아니라 가야만 했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뒤, 굴곡진 과거와 내면의 전쟁을 벌여야 했던 나는 그 억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선택했고, 그리하여 별로 친하지도 않은 대학 동기와 여수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절망적이게도 첫날부터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억센 비가 내렸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오동도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 힘겹게 카메라를 들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촬영을 멈추고 나는 바위에 끝없이 박히고 마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삶의 장벽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사는 나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파도는 하얀 거품을 만들어내면서 쉴 새 없이 바위에 몸을 내던졌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바위는 단단했고 물살은 가벼웠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이 처연한 자연의 질서를 보며 꽤 잔인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보기에 나와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 들었지만, 나는 이것과는 조금 달랐다. 난 파도나 물살 같은 큰 개념에 속한 인간형이 아니었다. 나는 단단한 바위에 부딪혀 뿔뿔이 분산되고 마는 물방울, 힘을 잃으면 자연스레 기화되는 증기에 더 가까웠다.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렌즈 뚜껑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수평을 맞추었다. 그러나 비바람이 부는 우중충한 날씨 탓에 깨끗한 사진은 하나도 찍히지 않았다.


폭우는 여전히 매몰차게 쏟아졌고 해상케이블카는 발권이 연기되었으며 폭우를 뚫고 찾아간 음식집은 문을 닫았다. 대학 동기는 이기적인 데다 무뚝뚝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나는 왜인지 모르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자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도 자살에 대해 생각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과거에는 분노와 억울함에 기초한 충동이었다면 이번에는 답답함과 먹먹함, 그리고 이 모든 걸 바꿀 수 없다는 처연함과 체념의 감정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이런 감정들에 둘러싸여 미지의 문턱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자살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이 두려워 자살하지 않는 걸까. 죽음 자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을까. 죽음의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무엇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억울함이었을까. 어쩌면 언젠가 작은 희망이 올지 모른다는 영화 같은 믿음에 잠시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더럽히고 있음을 자각한 순간 깨달았다. “아직 죽을 때는 아니구나.”


다음 날, 산봉우리가 보일 듯 말 듯 스산히 퍼진 안개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했다. 내용도 비슷했다. 중심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찾은 여수. 난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쓸쓸한 표정으로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는 조금씩 기세를 잃지만, 금오도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배차 간격이 70분이 넘는 버스는 도무지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한 시간이 지나자 109번 버스는 느릿느릿 도착했고 한참이 걸려 겨우 어촌 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다. 버스 안에는 어촌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가득했다. 그들은 두 손으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짐을 끙끙거리며 승하차했다. 그때마다 귀찮은 듯 뒷문을 살피는 버스 운전사의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버스 안에서 20대라곤 나와 동기 둘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무언가 마음이 심란해졌다. 저들은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될 노인들이 아닌가. 이들은 그 긴 시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이들 인생의 1/3 정도밖에 살지 않은 내가 먼저 하늘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작은 희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꽤 멋진 일이야. 죽음이 오길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 다가가는 행위 말이야. 보통의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어느덧 버스는 우리를 신기 마을에 내려놓았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니 신기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의 바다는 안개와 흐린 구름에 둘러싸여 제법 운치가 있었지만 어쩐지 슬퍼 보였다. 울다가 막 그친 아이처럼 조금만 수틀리면 소나기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몇 장의 사진을 찍어 그 슬픈 풍경 속에 나를 집어넣었다. 나도 그 안에 있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실제보다 조금 더 흐리고 암울하게 찍혔다. 빛이 없는 카메라는 한없이 슬픈 존재다.



금오도에 도착해 뽈락 매운탕을 먹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하늘은 맑아다. 동기와 나는 남면택시라는 금오도에서만 운용되는 택시를 타고 3코스의 시작점 직포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에메랄드 빛깔의 물고기가 튀어나올 것 같은 신비로운 자태의 바다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 빛깔은 실로 오묘해서 색깔이 미묘하게 다른 물방울이 모여 거대한 도시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명도와 채도가 각기 다른 푸른색, 초록색, 남색, 보라색 물방울이 자신의 매력을 뽐내려 안간힘 쓰는 것 같기도 했다. 어서 들어오라는 저 넓은 바다의 유혹에 순간 정신을 잃고 입수할 뻔했으나 곧 정신을 차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전망대에 도착했다. 은은히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투명한 빛이 길을 만들어 바닷속 깊은 곳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문득 예전에 읽은 미야모토 테루의『환상의 빛』이 떠올랐다. 너무 아름다워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빛이 머무는 곳에 당도하면 영원히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는, 그렇게 사람을 자기 심연 속에 빠트려 영원히 영혼을 잠재우는 빛. 나는 그런 빛의 한 형태가 회색빛 구름 사이를 비추는 저 빛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간절히 기도했다. “나도 꼭 한번은 너처럼 살고 싶어.” 이날을 추억하며 얼떨떨한 미소를 지을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니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내 여수를 떠나면서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아름다운 공상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어렴풋이 어떤 진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흔히 속력보다 방향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때로 속력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난 방향 이전에 속력을 올리고 싶었다. 어디로든 훌쩍 떠나 무엇이든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것. 마냥 버티는 삶이 아니라 무엇이든 하는 삶. 후에 더 비참한 결과가 초래될지언정 나는 보트의 속력을 높여 먼 수평선 끝에 도달하고 싶었다. 여수 여행의 수확은 그러한 삶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여수 여행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숱한 유혹과 질투심에 감정은 심란해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방향을 정해놓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냥 움직이다 보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생기게 되고, 그 순간 내리는 선택이 쌓이고 쌓여 어떤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여수시외버스터미널의 관광버스가 얼마의 속력으로 나를 서울로 인도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렴풋한 기억으론 그렇게 느리진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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