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사무친 저항과 정열의 통곡소리 앞에 놓인 시집 하나 이상화의 "파란 비"를 읊으면서 무념함으로 뚫린 내 마음에 채워본다 역사의 공백이라는 세월 속에 안일함으로 살아온 현대인이라는 매정한 나 자신 사소한 것에 푸념 늘어놓으며 혀가 마르도록 볼멘소리 터져 나오던 나의 모습은 백년 전 민족의 멍에 아래 고공행진하며 쌓아 올린 유구한 정신, 지나가던 벽보 한 장 쳐다보듯 시집을 대했던 나에겐 이제 성숙함의 안식처. 그에게는 어디에도 없지만 아득히 매웠던 개구리 소리 들으며 입을 모았건만 나에게는 발치아래 세상없이 까마득히 모르고 살았던 빛깔 고운 청춘이 한심하랴 머리 감다 들려온 개구리소리, 이제 지금의 나도 귀를 맞대어본다. =========
서럽게 짓밟으며 걷는 눈길, 걸음이 무거웠는지 무릎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네 구름도 부담스러웠는지 지평선 넘어가버린 달 쫒듣이 날 피하듯이 몰려가네 평소에 말라붙었던 진흙탕이 거슬렸는지 더 이상 걷지 않고 동동구르네 질퍽질퍽 어찌나 사람 흔적에 미련이 남았던지 몸에 진흙이 달라붙는다 그저 갖은 수모에 대한 나의 치졸한 상념일까? 자연을 추켜세우면서까지 비겁한 합리화일까? 아니 그 무엇도 필요 없었다. 그저 더러워져 새까맣게 굳어버린 흙덩이나 일단 치워보자 뭔 가모르지만 불쾌하다. 떼어내서 보니 하찮게 다닥다닥 정교해진 얼룩 길을 가려는데 방해만 하는 주제에 흙 따위에게 무슨 목적이 있으랴? 그저 묻어가려는 걸까? 옳지, 차리리 너희들이 낫겠다. 이젠 갈 필요도 없는 일그러져 보이는 서광 너머의 잡히지도 않는 선망의 그림자들이여..
관동별곡을 보았다네 희미해지는 임금의 용상 자국이여, 백성이 아뢰는 소리는 십이 첩 밥상에도 올라오지도 않는구나 소나무 밑동에 새겨놓은 선비들의글귀는 영혼도 없는 채 갈길 없이 험한 산세 유랑하는구나 밭고랑은 더 이상 지을 씨앗도 없이 앙상한 풀때기 한 움큼도 보이지 않는구나 인자한 마음으로 임금을 헤아리러 조선팔도의 풍광을 어루만지며 관동별곡을 썼거늘 한탄 섞인 북악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경화루 기왓장루에도 스치지 않는구나 나루터에 배 띄우며 은은한 벌레 소리 들으며 서북쪽 고개 돌리니 천리 밖이랴.. 외면받은 나그네 어찌 되었는지 연유를 물어보니, 그저 고개 떨구며 나직한 목소리 용기 내어 불러보네 "말씀드리옵니다, 임금에겐 바른말하는 신하는 대역죄인이요, 어진 임금에겐 백성이 용안이요, 그러나 굶주린 백성에게 천하란, 수풀만 무성한 산길일세"
칼날이 목에 겨눠지는 살기 돋는 지하바닥, 권력찬탈의 소용돌이에 무참히 짓밟히며 주저 없이 일곱 걸음마 옮기며 "칠보시" 써본다 수많은 장병 앞에서 함께 죽기를 손꼽아 각오했건만 보기도 싫을 초췌해진 동생의 모습 그리도 싫더냐 영웅호걸 술잔에 비친 아버지의 당찬 모습은 온대 간데없고 야수의 더러운 모습은 주체 못 할 그의 손아귀에 드리워지네 마주치지도 않을 그의 옷깃을 곱씹으며, 시 한 펀으로 다가올 세월 그에게 헌납하네 한줄기에 태어나 구워진 낱알 한 톨은 넌지시 그의 입안 곳곳 가득 채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