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10대, 20대 초에 읽고 충격을 받은 작품이었고 지금 읽으면 좀 더 보이는 부분이 많을까 해서 꺼내봤는데, 무언가 새로 찾았다고 하기보다는 그냥 다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 전쟁이 앗아가는 것,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간략하게 적으면 아래와 같다.
2차 대전 중 필리핀에서 폐병을 앓지만 식량이 없어 병원에 못 들어가는 군인 다무라. 그는 부대에서도 쫓겨나 들불이 타는 전쟁터를 헤매게 된다. 들불과 집이 보이면 적이 있을지 경계하고, 실제로 현지인을 마주치게 되기도 한다.
다시 헤매기 시작한 다무라는 심각한 굶주림을 겪게 되는데 마침내 마주치게 된 일본 군인의 시체에 눈이 간다.
전쟁은 생명도 재산도 모든 걸 앗아간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이미 물질적인 부분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흔히들 표현하는 가족과 못 만나는 슬픔이나 억울함, 적이나 자국에 대한 감정,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 등 살고 있어야만(어느 정도는 사고능력과 에너지가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욕구나 감정은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고(있긴 하겠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자유, 의지, 존엄성이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를 보여준다.
정말 모든 장면에서 공포를 느꼈고 그래도 계속 읽게 되는,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기는 그런 작품인 것 같다.
묘사도 생생해서 전체적으로 잔인하고(그로테스크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아프고, 긴장감도 넘친다.
그리고 이 소설이 보여주는 건 "인간임"을 앗아가는 전쟁은 전쟁 중에만 그 잔인함을 발휘하는 게 아니다는 점이다.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와도 참전한 병사들은 "전쟁터"에 남아 있다.
(극한의 상황을 겪었다가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입게 되었다는 점에서 영화 "디어 헌터"에 나온 러시안룰렛 중독자가 된 "닉"이 생각났다)
전쟁터의 극한의 상황도 전쟁이 끝난 다음에 보이는 아픔도 군 사령부나 정부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읽으면서 억울함을 느끼기도 했다.
오로지 "삶"에만 매달려야 하는 극한의 상황과 "삶"조차도 포기한 순간의 허무함.
이 소설이 표현하는 전쟁은 그런 것이고 이 책 하나 읽으면 전쟁에 찬성할 사람은 없을 텐데... 싶지만 그래도 있는 게 현실이라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