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채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해 유씨 부인이라 부르는 이장현이 슬프다. "부인의 남편이 <당당한> 종사관인데..." 라는 점에서 그가 길채를 놓아줬던 이유가 보인다. 조선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달리 구원무는 어엿한 자기 '자리' 가 있는 사람이니까... 길채가 나의 길채, 가 아닌 유씨 부인, 으로 산다면 행복하리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 당당한 종사관 놈은 자신의 자리를 통해 유길채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라데이션 분노가 차오른다. 사랑하니까, 당당한 종사관 나리의 부인으로 살길 바라며 어떤 마음으로 보내줬는데. 포로시장에서의 묶인 손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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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따라 드릴까요. 노래하고 춤이라도 출까요. 아니면, 다른 걸 원하십니까...?" 그 모든 걸 원했을 쓰레기들을 스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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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을 수 없는 은혜가 부담스러우니 나를 모른 척 하라, 라고 독한 말로 상처를 주던 것도 사실 내 말을 존중해줄 거란 기저의 믿음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했던 거겠지. 나를 사랑하던 이장현을 기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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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이장현의 말은 유길채에게 그 어떤 말보다 더 안심이 되었을 거다. 유길채는, 병자년 전쟁 때도 곁에 이장현이 있어야 숙면을 취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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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톡턴, <미녀일까 호랑이일까> 읽은 게 얼마 전이었는데. 작품은 공주와 공주의 혈통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반쯤) 야만적' 이라고 설명하는데 읽으면서 생각했던 게 대체 무엇이 야만인가라는 거였다.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문명인가. 드라마랑도 맞아 떨어지네. <오랑캐> 황녀인 공주. 야만적으로 보이나, 그건 하나의 껍질에 불과한.
Female 이 Woman 으로, Woman 이 Lady 로 지칭됨에 따라 제국의 '문화' 는 삶의 방식을 넘어 사고까지 결정짓는 규범을 만들어왔을 텐데. 그 과정에서 공주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사적인 감정마저도 '무엇에, 어떻게' 반응해야 한다는 규범에 따라 통제 당해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드라마에 따르면 황녀도 아마 그런 학습의 과정을 거쳤을 테고, 그러나 보다시피 거기에 순응하는 것 같지 않네. 사실 이런 문명의 규범에서 벗어난 야만성의 또 다른 이름은 '예측 불가능함' 인데, 외부에서 보는, 즉 드라마에서는 시청자가 보는 공주의 <반쯤 야만적> 인 특성이 어쩌면 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당신의 규범적 기대치를 예상하고 수용하나, 사실 당신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그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 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었고. 더불어 이야기의 구조상 선택 직전에 질투로 휩싸인 공주의 속내를 이야기하는 것도 마치 프레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외부에서 보기엔 이 공주의 사랑이 '(반쯤) 야만적' 인 사랑이었을지라도 공주는 자신의 방식대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그를 사랑했으리란 건데, 그때 내린 결론이, 내가 갖지 못할 사람을 향한 질투에 공주가 당연히 그를 호랑이 밥으로 내던질 거라는 생각은 통념에 불과할 거라 생각했었다. 자신의 손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을지언정, 공주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삶을 이어가게 할 거라 생각했는데. 각화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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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눈빛이 변했다.
강화도에서 발휘했던 기지가 이렇게 돌아오네. 길채가 행한 선이 삶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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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채는 장현이 자신을 싸고 돌면 장현이 죽을 걸 알고, 다시 장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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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인을 다른 사내가 찾으러 가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게 내 안사람을 돕는 길인 줄 아시오?"
원무 진짜 뭐하는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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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길채랑 노는 게 젤 재미났답니다. 길채는 샘도 많고 욕심도 많고 정도 많았지요. 전 그렇게 뭐든 많아서 싱그럽게 통통 튀는 길채가 참 좋았답니다. 그리고.. 길채는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은애는 길채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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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덕과 지혜를 사모하여... 소인, 기실, 스승님의 <힘> 을 사모합니다."
남연준, 현실을 지독하게 깨달아버렸네.
"전 저들이 지르는 비명을 보았습니다. 백성의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제 생명의 은인이 화를 당한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제가... 밥버러지처럼 여겨져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자도 쓰일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아니 밥버러지가 아니라, 사람 꼴을 하며 살 수 있게 저를 들어 써주십시오."
한 인간이 사회 내에서 사람이 된다는 건 뭘 뜻하는 걸까. 배운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할 줄 모른다는 연준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좌절하던 연준이 무력감을 느끼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고, 현실을 뛰어들고자 하는 모습, 정말 너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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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채 무지 똑똑해. 폐하의 여자가 되면 황녀조차 자신을 함부로 못 건드리란 걸 안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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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채-홍타이지 대면씬 진짜 인상적이네.
홍타이지 자기 나름대로 이치에 맞는 공명정대한 제국을,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을 텐데. 그간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대화하지 않으려 하던 이들만 보다가 길채 같은 사람 보면 나 같아도 일단 들어줌. 적과의 전쟁에서 진정으로 승리하려면, 그를 오랑캐, 라고만 취급하며 외면하지 않고 우선 그가 인간임을 인정해야 하고 대면해야 하지 않나.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이고, 그렇기에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무수한 면을 보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물론 그 또한 전근대에 사는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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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음이가 무슨 욕심을 부렸다고 까는지 모르겠다. 량음이가 내는 욕심이라면 장현이가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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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 엇갈림의 순간을 곱씹는 이장현이 떠올라서 먹먹하네. 사실 장현이는 길채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었지만 자꾸 타이밍이 어긋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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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길채, 살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 돌아보고, 끄집어 내어서는 안 될 기억이 떠올라 돌아보고, 돌아보아서는 안 될 그 누군가가 떠올라 돌아보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고...
그렇게 기어이 돌아봐 소금기둥이 돼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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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사는 길을 택하겠어, 네가 죽는 길을 택하겠어?"
장현이 목숨을 구걸하더라도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길채가 집으로 돌아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자기 목숨을 걸어버렸던 게 먹먹함.
하지만 길채는 녹지 않을 거야.
장현의 선택이 마냥 가슴 아팠는데 속환할 수 있는 몸이 되었음에도 자신의 의지로 장현의 곁에 있기를 선택하는 유길채 보여주려고 그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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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켜주지 못했던 시절의 상처에 가만히 손을 대다가 만지고 싶었던 뺨을 쓰다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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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지만, 작가 자신이 설계한 세계관 내에서 각자의 논리에 따른 행보를 보여주고 그에 따라 서사가 구축되는데... 여캐뿐만 아니라 그냥 모든 캐릭터가 그래서 흥미로워. 모든 인물들이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고, 그 선택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게 너무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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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아프니 온전히 내 차지가 된 것 같아."
작중 내내 계급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수평적 관계가 아니란 생각에 망설이다가, 로체스터가 눈이 멀고 불구가 되어서야 (인간적이게도) 자신의 사랑을 위해 돌아온 제인이 생각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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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길채, 어디서든 다복하게 땅에 발 딛고 함께 늙어가는 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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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인물들이 억압에 마모되고 으스러져도 지키고자 하는 무언가를 위해 고개 빳빳이 들고 운명과 구조에 저항하며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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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 마지막에 길채 말고 장현이 겨눠서 쏜 거 좀 놀랐었음. 이장현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던 거 같아. 죽지 않고 목숨을 구걸하며 삶을 연장하던 이들처럼 당연히 목숨을 구걸할까, 아니면 내내 다른 이들과 달랐던 것처럼 다른 선택을 할까... 내심 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겠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다소 문화충격이었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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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 캐릭터 흥미로워. 다른 캐릭터도 마찬가지긴 한데 극중에서 캐릭터가 보여주는 사고와 행동에 이유가 있어. 그런데 그 이유가 극의 맥락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고 (신분, 여성의 위치 등..) 작중 누구보다 사랑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서 매력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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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채=조선백성이라는 은유를 생각해보면 소현이 심양으로 떠났고, 장현이 그 뒤를 따랐던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길채가 심양으로 가면서 2부의 시작이 열린 게 맞는 것 같고 3부가 있다면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와서 직면해야 할 상황들이 될 것 같다.
사실 2부가 시작되기 전엔 1화 첫 장면을 곱씹으면서 포로사냥꾼 노릇에 따른 매국 업보인가 생각했는데 생각이 바뀜. 소현과 함께 돌아온 후 직면하게 된 인조 세력의 (왕에게 세력이라 칭하는 게 웃기긴 한데) 반발이 아닌가 싶음. 비록 그를 비롯한 소현은 구세력의 반발에 짓눌려 피를 흘리지만 역사엔 언제나 그들처럼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이들의 피땀눈물이 있었고... 그 피는 희생으로만 남지 않고, 파도에 섞여 새로운 세계로 향할 힘이 되었다고 생각함. (새로운 세계로 완전히 나아가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세계를 받아들일 힘이 축적된 거면 좋겠고.)
들리는가, 이 소리, 꽃 소리... 는 결국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 그 열망이 각성되기 전 흩뿌려졌던 수많은 이들의 피땀눈물인 거고. 그렇기 때문에 시퀀스의 마지막에서 장현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맞선 것이라 생각한다. 맞서야 그들의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을 테니까. 유길채와 이장현이 살았으면 좋겠다. 살아서 함께 태양 아래에 발 딛고 웃었으면 좋겠다.
영상 다시 보고 왔는데 칼에 배인 피가 파도에 씻기는 장면, 아직은 해가 구름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걸 보여주는 게 좋다. 태양은 구름 뒤에 가려져 있는 게 맞다. 그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곧 장현의 뒤에 모인 구시대의 반발일 거고. 그치만 역사의 순리가 있다면 그 구름은 곧 걷히는 게 맞다. 거센 파도는 타자와도 같은 서로와의 끊임없는 충돌을 통해 바다를 이룬다. 그렇게 향한 바다는 나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 닉 캐러웨이, <위대한 개츠비>
드라마를 보며 서막에서 장현이 읊조렸고 열망했던 꽃소리가 무엇일까 내내 궁금했는데 답이 얼추 내려진 것 같다. 에너지 다 쏟고 노곤해져서 새벽에 다시 서막을 곱씹고 나니 드라마가 더 좋아졌어. 그리고, 감히 해피 엔딩을 꿈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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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영화/드라마를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면 '킹덤 오브 헤븐' 이 제일 좋았는데 드라마로는 '연인' 이 될 것 같다. 특히 전쟁 이후 피지배층의 일상 삶에 스미는 여파를 다룬다는 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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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미운 건 단순히 내 선조면서 왜 이리 무능해, 라기 보단 군주로서 수많은 이들의 삶을 어깨에 짊어지겠다고 반정을 일으켜놓고 정작 그들의 손이 자신을 붙잡을 때 저 하나 살겠다고 그 많은 손들을 끊어내는 것도 모자라 다시는 일어설 수조차 없게 짓밟은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물론 자기 딴에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겠지만 결국 역사가 평가하게 되는 게 흥미로워. 그 평가 과정 속에서 선악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도 재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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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 누구의 시각에서의 바보인지가 궁금해진다.
세자가 계몽의 대상처럼 그려져서 불쾌하다면, 그래서 바보처럼 여겨지는 거라면 그건 본인이 정말 너무나 지배층의 시각에서 극을 보고 있다는 거고 세자를 완전무결한 성군으로 보고 있다는 소린데 작품은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까...
불편한 진실에 눈 감고 싶어도 괴로움을 감내하고 현실을 직시하려 노력하는 인간 소현세자가 매력적이라 생각해. 여타 드라마에서처럼 인조 치욕만 보여주고 소현강빈이 어디선가 말 타고 휘리릭 와서 신문물이요! 하는 거보다 조선의 세자로 교육 받아온 사람이 왜 '변했'는지, 변하게 된 계기는 뭐였는지, 그동안 맞닥뜨리는 대립항은 없었는지 난 그런 게 궁금하고 그런 게 있어야 재밌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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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이장현과 유길채는 당대 조선 백성이 지배구조에 가졌을 의구심과 그러면서도 넘쳐흘렀을 생명력의 표상이나 마찬가지인 인물들인데 그 인물들이 실존 인물 모티프로 한 캐릭터에게 '조언' 하고 그를 움직이게 한 게 그렇게까지 화가 날 일이라는 게 신기하다. 소현세자는 진공 상태에서 태어난 인물인가? 삶 자체가 상황적 조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바스라진 사람인데... 그 성장 과정에 백성/작가 목소리 투영한 인물 하나 있으면 안 된다는 게 납득이 안 가.
난 솔직히 전근대 제국 및 지배층의 폭력 생각하면 왕이고 세자고 왜 그렇게 칭송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고... 업적이 있어도 혼자 이뤘을까. 그 아래 손발이 되어준 수많은 이들이 있으니 가능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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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유길채, 이장현, 경은애, 남연준, 소현세자, 강빈은 걷고자 하는 길을 알고 그 길 위에 놓인 현실을 직시하고 용기 있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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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오랑캐의 왕이라 불려도 결국 그 사람도 연인을 상실해 슬픔에 영향 받는 인간이었네.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러 군상을 그린 거, 그리고 그 선택은 제각각인 거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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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공포와 혐오로 가득 찬 시선이 아닌, 있는 그대로 올곧게 보는 게 좋아. 적과의 전쟁에서 진정으로 승리하려면,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이고, 그렇기에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무수한 면을 보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이건 적이 되는 타자를 무찌르기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만 본인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전에도 이야기했듯 내가 정正이라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반反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합合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에 이르러야 한다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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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에 량음이 노래를 부르는 것에 동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번 화에서도 계속 강조했던 게 "<나에게> 이야기를 하겠다고 <우리말> 을 배워?" 라는 것.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 조선 노비에게 저런 말을 듣는 게 배알이 꼴린 걸지도 모르겠단 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저 대사 자체는 나와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이에게 호기심이 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 대 인간이랄까, 오랑캐라고만 생각하면 그들이 가진 단점만 보여서 내가 처한 처지를 제대로 파악해서 이길 수 없게 되니까. 그들이 가진 장점, 그들이 가진 인간적 면모를 파악하고 그 점을 파고들어 내걸로 흡수할 수 있는 건 흡수해야 진정한 승리가 가능하다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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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됐든 속환된 몸이 되었음에도 길채가 자기 의지로, 자기 선택으로 장현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게 좋아서 죽음을 무릅쓴 장현의 선택이 가치 있게 여겨지네. 사실 둘 다 굴종하며 사는 선택을 했더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겠으나 둘의 사랑이 영원했을까 싶고... 진실로 이장현에게는 진짜 다 필요 없고 유길채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 마음을 이해하고 곁에! 있어주는 것도 깨달음의 과정이라 보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서야 본인이 원하는 바를 얻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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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가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랑의 세계' 를 목격하고 흔들리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좋았어.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은 남편이 일종의 <해소되지 않은 의문> 으로 남았지만 분노가 앞서서 남편을 죽이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남게 된 건데... 눈 앞에서 여태 보도 듣도 못했던 어떤 사랑이 나타나니 뭐지 이것들? 뭐지 이 상황은? 하면서 존나 혼란스러웠을 거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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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 그도 타이밍이 엇갈려 사랑을 잃었나 보다. 인간은 미래의 안위를 염원하며 현재를 희생하지만 사랑을 잃지 않으려면 지금현재를 내달려서 그 사람에게 닿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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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음이한테 설정만 잔뜩 안겨주고 끝이라고 할 수도 있는 걸 작중에서 얘 살아온 인생을 알 수 있게 풀어준 게 좋아. 내가 해석해 온 량음도 다 작중에서 설명된 걸 기반으로 한 거라... 극중 인물들은 17세기 성리학 사회를 사는 인물들이니까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화면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인물에게 이입하고 이해할 여지가 충분히 차고 넘친다 생각해서.
양천은 애초에 같은 포로 여성도 이해 못하는 그 시대 인습적 사상에 찌든 인물이고 이장현은 애초에 다른 여자여도 유길채가 아니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다. 드라마 밖에서 어딜 감히! 논조로 캐릭을 비난하는 시선은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작가가 캐릭에게 박했다..? 는 잘 모르겠다. 뭐 사람에 따라 박할수도 있다 보지만 현실적으로 작중 위치에서만 해도 꽤 많은 과거와 행보가 보여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내적으로는 끝났는데 외부에서 계속 고민을 하라고 흔드는 모습이라, 그래서 흔들리는 것 같아서 슬픔. 전에 17세기 사회는 량음과 같은 인물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래서 량음에게 노래가 주어진 거라 생각함.
문자권력을 비롯한 언어는 주류 규범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한 사회의 억압된 무언가를 가시화하는 것 자체가 진보의 일환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론 문학, 특히 노래를 비롯한 구술문학이 그 사이 비어 있는 간극을 파고들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난 작가가 량음에게 노래할 수 있는 목소리를 준 거라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