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확고하게 섰으며
마흔 살 때는 의혹이 없었고
쉰 살 때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소리에 통하고
일흔 살이 되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기지 않았다.
공자의 제자들이 모아 낸 논어에 쓰인 이 구절을 보고 서른에 나는 무엇을 했었나 생각하며 한심해하며 애통했던 기억이 있다.
내 서른에 확고하게 서 있는 것이라고는 밥을 먹어야겠다는 의지 하나뿐이었다. 나한테는 서른이 중요했다.
서른 하나도 안 되고 서른 둘도 안 되고 딱 서른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글을 남기지 않은 이유는 책 하나 덜렁 읽고 나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상상해 본다.
글로 남기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
글로 써서 오래도록 자신의 생각 기록을 오래도록 보관하고 싶지 않았을까?
내 생각을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공자가 내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이 써서 정리한 책이 아니나 다를까 한 때는 서열을 중시하는 답답한 책이네, 시대에 맞지 않네 하며 홀대를 당한 것만 봐도 기우는 아니다.
공자의 말을 모아 놓은 논어도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도 정답을 주지 않는다. 고민을 일 삼아 하던 내가 논어를 뒤적거려 봤지만 답은 없었다. 깨달음만 있을 뿐이다. 정답은 줄 수도 없다. 인간이 처한 상황이 다 다르고 원하는 게 다른데 정답이 있을 리 없다. 선택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 인생이고 선택은 나를 돌아본 후 하는 것이다.
나는 선택을 잘하냐고? 못 한다. 햄버거 가게에서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도 못해서 두 개 사서 반반씩 나눠 먹을 때도 많다.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 더 많이 하고 싶은 욕심, 더 빨리 가고 싶은 욕심이 나를 선택장애로 만든다.
아이를 키우는데 꼭 필요한 것이 관계, 습관, 책이라는 책을 내고 나니 묵은 변을 쏟아낸 듯 시원하면서도 내 의도와 달리 받아들여지면 어쩌나, 오해받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든다. 글이 후진 것은 둘째치고 내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쩌나 싶다.
두서가 있는 말은 글보다 낫다.
의사소통에 급이 있다면 문자로 하는 거보다야 전화가 낫고 전화보다는 만나서 하는 것이 낫다. 비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것이 우리가 어렵고 소중한 사람을 대할 때 아직도 애용하는 방법이다. 적어도 세 번은 와서 얼굴을 비추는 성의를 보여야 큰 일을 함께 도모하고 싶은 마음이 동한 이도 있다.
그래도 말보다 글이 난 경우는 말이 두서가 없는 경우다. 두서없는 말은 내뱉기가 쉬워도 글은 두서없는 경우라도 머리에서 손까지 신호를 보내야 하니 가는 사이 나름 두서가 생긴다. 부정적인 말도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할 때 부정이 정제되고 덜 전달되니 글로 속상했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되려 나을 성싶다. 글이 못한 이유는 자유롭지 못해서다. 생각을 글자라는 까만 기호에 가둬 두는 것이 글이다. 속세에 찌들고 작은 것에 목숨 거는 소심하고 평범한 나는 생각을 가두기로 결정했다. 우물 안 청개구리의 배포를 어쩌지 못했다. 글이라도 잘 쓰면 좋으련만.
무엇을 배우는데 최고를 책이라고 쳐서 책을 쓰고 아이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길러주려는 것은 아니다. 가서 직접 해보고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는 게 좋다. 못 먹겠으면 냄새라도 맡아도 좋다. 사랑에 치여서 울어도 보고 칠렐레 팔렐레 히죽거려 보는 것이 좋다. 책은 3순위다. 그런데 시간이란 녀석이 야박해서 따박따박 수금하듯 돌아가니 제일 쉽고 제일 빠른 편법이 책이다.
책이 아니라면 어떻게 침대에 드러누워 10분 만에 숲 속 100층 짜리 집을 여행하는 벌레들을 만나고 올 수 있을까?
최고가 아니라 최선이다.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안 한 것을 하겠다고 덥석 책을 냈으니 걱정에 애꿎은 브런치를 붙잡고 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