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습.관.
내가 존경하는 위인은 세종대왕이다. 그런데 어디 가서 누가 제일 좋아하는 위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세종대왕이라고 선뜻 말하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수준의 역사 수준 밖에 없는 것이 탄로 날까 싶어서다. 13년째 미국에서 한국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매년 찾아오는 한글날 수업에서 나는 세종대왕을 만난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세종대왕은 힙스터다. 거센소리, 된소리를 만들어내는 획을 더해 만든 규칙도 그렇고, 소리 기관의 모양을 본뜬 글자도 그렇다. 그중에 제일 놀라운 것은 백성들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개발하려고 했다는 거다. 아무리 고깝게 보아 양반들을 견제하려는 의도라고 해석한다고 해도 이 발상이 민주주의의 핵심인데 왕이 이런 생각을 해냈다는 것이 놀랍기 그지없다.
나하고 아주 친한 친구는 음악광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맨날 좋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마(M)'씨 삼 형제가 있다. 마이클잭슨, 마일스데이비스, 메탈리카. 들을수록 좋단다. 들을 때마다 다르단다. 그 옛날에 지금 같은 컴퓨터 기기나 최신 음향도 없었는데 시대를 앞서간 시도란다.
에이 남들 다 아는 음악가인데 마니아라고 하기에는 너무 시시한 거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세종대왕을 말을 못 한다.
아이들과 책을 고르러 도서관에 가면 우리는 허리띠를 풀고 뷔페에 온 사람들 마냥 미친 듯이 책을 쓸어 담는다. 공짜 아닌가. 책을 들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표지만 좋아도 그냥 도서관 가방 접시에 올라간다. 이렇게 쓸어간 책들 중에는 별다른 재미가 없는 책도 있다. 유명한 만화 캐릭터를 이용해서 만든 책들이 자주 접시에 올라오는데 영화 내용을 추리거나 각색한 경우가 많다. 다소 불량식품 같은 책이더라도 같이 읽는다. 책을 읽는 목적이 깨달음 하나만도 아니다. 아이들처럼 캐릭터가 좋아서 볼 수도 있다. 마음 같아서야 브로콜리, 최고급 한우만 먹이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우리는 미국에 사니 가끔 여행을 가면 한식을 자주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아침부터 베이글로 시작해서 점심에 햄버거를 먹으면 아이들은 저녁엔 그냥 호텔에서 라면을 먹자고 한다. 불량식품도 가끔 먹어야 한우의 진가를 안다.
문제는 입맛이 변한다는 것이다. 또 유행이라는 것이 대세를 만들면 우후죽순 생기기 때문에 순박하고 진실된 양념 안 된 책은 조용히 가려진다. 그래서 선생님이 뒤에 붙은 분들은 싸구려 입맛을 질타하고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애들을 쓰신다. 순박해 터져서는 촌스런 문체와 표지 속에 넋 놓고 마냥 기다리는 고전들이 안타까워 추천목록에 넣기도 하며 편도 들어본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친절한 분들이다. 안 좋은 책은 책이 아니다, 읽지도 말고 만들지도 말라고 하면 좋겠지만 그건 독재다. 진짜배기를 모르는 우매한 마음, 나쁜 일에 쓰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결국 모든 백성들에게 한글을 배포한 세종대왕이 우리에게 선물한 민주주의 덕분에 우리에게는 책을 마음껏 고를 자유가 있다. 세종대왕이 인간을 믿었다는 것에 한번 더 놀란다.
권정생 선생님 책에 '고전'이 붙을까 걱정이다. 배유안 작가의 '초정리 편지'에 '고전이' 붙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잊히면 어쩌나.
아이들이 '고전'이라 계급장 붙은 책들을 낡은 것이라 오래된 것이라 밀어 놓지 말고 봐줬으면 한다. 신간처럼 화려한 표지와 신박한 유행어는 없지만 얌전히 두 손 모으고 기다리고 있는 삼삼한 고전을 찾아 오늘도 아이들과 도서관을 쓸어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