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꿀이가 6살쯤인 봄 집 옆 공원에 모녀가 의기투합을 해서 출동했다.
우리의 임무는 두 발 자전거 정복.
처음 공원에 들어설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열심히 큰꿀이를 쫓아가며 내가 잡고 있는 건지, 끌려가는 것인지 확실하진 않았지만 숨이 턱끝까지 차도록 자전거를 잡고 뛰었다.
그런데 그만 큰꿀이가 넘어진 것이다.
하필 넘어진 곳에 작은 유리 조각이 같은 것이 있었다. 다행히 긴 바지를 입고 있어 상처가 깊진 않았지만 그래도 베인 상처가 났다. 큰꿀이는 피가 살짝 비치는 다리를 붙잡고는 짜증을 부렸다.
엄마, 왜 나 안 잡았어?
넌 왜 발 안 굴렀냐?
서로 원망하기 바쁜 우리 둘 중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목소리 큰 내가 당장 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겠지만 큰꿀이는 그 뒤로 한동안 자전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를 구해 주지 않는다고?
다 내 탓이라고?
넘어졌을 때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다고?
이것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잘 못 잡아줘서 엄마가 미안하다. 다 엄마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니다.
나도 뛰느라 죽을 뻔했고, 잡는다고 잡았지만 그 순간 넘어지는 걸 막기엔 내 힘이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유리가 있을 줄은 맹세코 몰랐다.
지금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없는 소리를 못하는 성질머리라고 하더라도 굳이 나처럼
누구 탓을 하냐고,
그 정도로 안 죽는다고,
엄살 부리지 말라고,
씩씩하게 벌떡 일어나라고,
뜨겁다 못해 손이 델 온도의 촌스런 응원을 내지를 필요는 없었다.
모질게 한다고 아이가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급하고 어리숙한 엄마였다.
12년 세월 동안 나도 나름 발전했다.
그래서 둘째가 자전거 타다 넘어지면
괜찮아? 안 다쳤어?
많이 아프겠다.
엄마도 놀랐어.
다시 탈 수 있겠어?
조심해서 다시 해보자.
라고 말하는 좀 더 미적지근하게 따뜻한 온도의 응원을 보내려고 노력 중이다.
온도는 다르더라도 여전히 넘어져 생긴 상처는 결국 자기가 책임져야 하고 깨진 무릎을 치료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일뿐이다.
적정 온도의 응원과 위로란 연고는 무릎에 생긴 상처엔 여전히 도움이 안 돼도 마음에 생긴 상처엔 효과가 있나 보다. 넘어지고 무릎이 까져도 금세 또 타겠다고 하는 걸 보면.
넘어졌을 때도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면 위로가 된다는 걸 자전거를 타며 배웠다.
위로는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롭게 않게 하는 약이란 걸 배웠다.
기다려주는 것도 응원이라는 걸 배웠다.
그리고 마음에 생긴 상처는 화상에 약하고 무릎 상처보다 훨씬 오래간다는 것도.
그때 엄마가 위로하는 법을 몰라서 미안했어. 너희가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달릴 거라는 믿음을 줘서 고맙다. 언제든 너희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줄게.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