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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령 Mar 23. 2023

괜찮아, 나도 모르니까

211229 연극 로테르담 후기

개인적으로 자첫했을 때 너무 좋았던 극들을 자둘했을 때, 자첫보다 극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온전히 다시 와닿지 않는 경우가 꽤 있었었다. 이 극도 처음 보고 나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었고, 인물들 대사 하나하나를 다시 곱씹으며 후기를 작성할 만큼 몰입해서 봤었어서 다시 보는 걸 좀 망설였었는데 짧은 고민 중 취소표를 줍게 되어 단시간 내에 다시 보게 되었다. 자첫이랑 자둘 텀이 너무 짧은 것 또한 그렇게 선호하지 않아서 그것도 걱정이었는데(다음에 올 땐 좀 더 길게 왔으면 좋겠다..) 결론은 다시 보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극장을 나서며 생각했었다. 처음 봤을 땐 전반적으로 앨리스의 시선으로 극을 봤었는데, 다시 보니 에이드리언의 시선으로 극을 더 많이 보기도 했고 조쉬의 입장까지 이해하면서 보다 보니 자첫때와 아예 다른 느낌으로 극을 보며 자첫 때 흘린 대사들을 제대로 머릿속에 주워 담으며 다각도로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됐다.



조쉬와 앨리스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조쉬가 항구를 바라보며 배들이 다들 어디를 향해 목표를 가지고 흘러간다고 말을 하며 자신은 이제 로테르담을 떠나겠다고 한다. 조쉬가 앨리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로테르담에 남아 같이 살았는지 알게 됐기에 이 대사를 듣고 앨리스로 인해 자신도 이곳을 떠나지 못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씁쓸해하는 것 같아 조쉬에게 더욱 마음이 쓰였었다. 그리고 앨리스가 피오나의 고백을 가정법으로 둘러 조쉬에게 설명하며 앨리스가 나는 백퍼천퍼 레즈다 할 때와 앨리스가 조쉬에게 베프가 떠나서 슬프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할 때 조쉬의 표정을 보니 굉장히 복잡해 보여서 앨리스에게 미련을 다 털어내지 못했구나 싶어 안타까웠었고.



앨리스와 렐라니가 펍에서 술을 마시며 앨리스가 본인이 벽장이라고 이야기할 때, 자신의 사촌이 부모님께 퀴어라고 밝혔더니 본인의 엄마가 부모 불쌍해서 어떡하니,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그 애는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하며 본인이 부모님께 커밍아웃하기 힘들다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앨리스 또한 커밍아웃하는 행위가 당사자의 부모님이 동정받아야 할 일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부모님께 자신이 남자임을 밝히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속상해하실 수도 있다고 말하며 본인이 엄마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받았던 상처를 에이드리언에도 무심결에 주고 만다.


그리고 앨리스가 에이드리언이 본인은 원래 남자였다고 끊임없이 어필하지만 극의 중반까지 계속 그에게 남자가 된다면, 남자가 됐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모습에 자신이 살아오며 만들어온 머릿속 체계 안에 에이드리언을 끼워 맞추고 있구나,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면모들이 불꽃놀이를 해본 적 없지만 시끄러운 거 싫어하고 위험하단 이유로 거절하는 등 렐라니와의 장면에서 새로운 것들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모습들과 겹쳐졌고, 에이드리언 또한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앨리스와 연애하며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일찍 이야기하지 못했던 이유를 짐작케 했다. 그는 앨리스의 이런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밝힐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또 앨리스가 계속 본인에게 닥친 상황들을 회피하는 모습들에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녀 또한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구나 싶어 자첫때처럼 쉽사리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래도 에이드리언이 앨리스에게 너는 헤테로라고 본인 멋대로 정체성을 규정해 버리는 부분은 또 봐도 앨리스에게 너무하다 싶은 장면이었다. 어쩌면 두 인물 다 완벽하지 못하기에 현실 연애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은 것도 같고. 그리고 후반부에 조쉬가 앨리스에게 너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하기 무서워서 도망친 거라는 말을 하는데, 에이드리언이 앨리스에게 청혼을 하자 앨리스가 헤어지자는 뉘앙스의 말만 하고 직접적으로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 또한 에이드리언이 헤어지자고? 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그 말을 하고 싶은 게 맞냐는 식으로 물어보는데, 앨리스는 이 말에도 어떠한 긍정이나 부정도 하지 않더라, 이런 모습들이 주변인물들을 힘들게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렐라니가 앨리스와 같은 방에서 잠옷을 입고 에이드리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여자 정신에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심리치료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면서 야유하는 듯한 추임새를 내뱉는다. 그녀 또한 성소수자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에이드리언을 향해 차별적인 발언을 할 때, 그것을 들은 앨리스의 심정은 어땠을까? 본인 또한 에이드리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재의 모습을 부정하고 나왔었는데 타인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조롱을 들었으니 아마 이 말을 계기로 다시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을 것 같았다. 자신마저 등 돌려버렸다는 생각에 괴롭지 않았을까.



이제 어떡하지?

모르겠어

괜찮아, 나도 모르니까



자첫했을 때도 두 인물이 서로 손을 맞잡으며 이 말을 할 때의 기차 안 장면이 뇌리에 박혔었는데, 다시 봐도 그랬었다. 그런데 처음 봤을 때는 두 인물이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 사귀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었는데 다시 보니 열린 결말이구나, 싶었다. 두 인물의 관계가 이제 어떻게 될지, 관객들의 상상과 판단 속에 맡기는 느낌이랄까 다른 분의 후기를 보니 '앨리스가 에이드리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를 못 할지언정 함께하겠다'라는 의미로 보여서 따뜻하게 느껴진다고 했는데, 이 말에 공감이 갔었다. 오래전에 '프라이드'란 연극을 봤을 때 2막 5장에서 "그냥 둬 보자, 너랑 나"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게 떠오르기도 했고, 생각해 보니 두 극이 공통되는 주제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프라이드도 다시 보고 싶어 졌다.



에이드리언처럼 앨리스 또한 저래도 되는 건가.. 싶은 장면이 없는 게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사랑스럽다.. 특히 나는 스트레이트인가~하며 한 팔을 뻗는 장면과 취중씬, 에이드리언의 손바닥에 턱을 부비는 모습 등등. 마지막 기차 장면에서 "안 괜찮았어, 괜찮을 수가 없었지" 이 말을 할 때, 눈물을 참으며 최선을 다해 본인의 진솔한 속내를 털어놓는 모습에 정말 앨리스의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어서 정말 연기 잘하신다고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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