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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Dec 20. 2023

제주에 오길 참 잘했다


탑승구로 이동하는 중 발걸음을 멈추었다. 파란 하늘을 담은 대형 유리창에 쓰여 있는 글자 때문이었다.

제주에 오길 참 잘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동시에 눈꼬리가 내려갔다.

정말이다. 제주에 오길 잘했다.

나를 다시 보았다. 현재를 더 사랑해야지. 나를 더 사랑해야지.

이제 다시 돌아간다. 내가 왔던 곳으로. 나의 일상이 있는 곳으로.

안녕, 제주




자동문이 열리고 단출한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얼굴. b였다. b가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노란색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내가 웃었다. b도 웃었다.

우리는 거리를 두고 서서 웃었다.

b가 꽃다발을 휘휘 돌리며 다가왔다. 마치 고인돌 만화에 나오는 원시인이 목표물을 포획하기 전에 밧줄을 돌리는 것처럼. 어이없는 행동에 웃음이 났다. b는 좌우를 살피면서도 계속 그 행동을 했다. 내 앞에 설 때까지. 난생 처음 해보는 행동에 자신도 어색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웬 꽃?
내가 좋아하는 꽃이야. 프리지아.
나 프리지아 안 좋아하는데. 난 파스텔 색 꽃이 좋아. 장미나 수국 같은 거.
참고할게.
왜 안 하던 짓을 해.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내가 꽃을 받아 들며 b를 올려보았다. b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어 입술이 갈매기 모양이 되었다. b는 대답 대신 어디 보자 하더니 나를 훑어보았다.

튼튼해졌네. 그렇게 부실하더니.
나 코끼리 다리야. 이제 많이 걸을라고. 산도 다니고.
같이 다니자.
웬일이래. 

내가 얼마나 애달팠는지 넌 모를 거야.  


b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은 여전히 갈매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오늘 마지막 글도 최고였어.


방금 전 제주공항에서 sns에 올린 짧은 글을 말하는 거였다. 글의 마지막 문장은 시답지 않은 글 읽어주시고 기다린다고 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였다.


난 잘 모르겠는데.
쿨하면서도 따뜻해. 네 문장은. 넌 이런 글에 더 잘 맞는 거 같아. 순간을 잡아내는 단상글.


내가 계속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b가 이어 말했다.


계속 글을 써봐.
맨날 일기 같은 글만 쓸걸.
그래도 괜찮지.
아무도 알아보지 않는 글.
내가 알아보잖아.
지금까지 못 알아봤잖아.
이제 알아봤잖아.
이제 알아보면 뭐 해. 나 사십대야. 너무 늦었어.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내가 b를 쳐다보았다.
b가 내 눈을 보며 다시 말했다.

내 눈은 정확해. 좋은 작가가 될 때까지 네 옆에 있을게.

b답지 않은 말과 행동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나도 b의 눈을 보며 장난처럼 말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
앞으로 안 변할게.

b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서서 웃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우리를 내려 보고 있다.

난 줄 알았던 우리 관계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다.

제주에 다녀오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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