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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Dec 16. 2023

마지막 밤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 바다를 보기 위해 말등대가 있는 이호동의 해수욕장을 찾았다. 탁 트인 하늘과 파란 바다가 보이자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어 양손에 한 짝씩 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바다를 보았는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이 아름다운 바다가 마지막이라니, 제주를 떠난다니. 실감 나지 않았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언제 다시 온대도 바다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나를 맞아줄 것이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말 없는 고민을 묵묵히 들어주고 조용히 묻어줄 것이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끝이 끝이 아님을, 시작의 다름 아님을 바다는 알려주었다.




유리문을 열자 어두운 공간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 혼자 술 마시러 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대로 마지막 밤을 보내기는 아쉬웠다. 열 평 정도의 아담한 가게 안에는 앳된 얼굴의 사장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성 일행과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빈자리에 앉아 미도리 샤워를 주문하고 핸드폰으로 오늘 찍은 사진을 보고 있는데 반대쪽에 앉은 남자 일행 중 한 명이 물었다.

몇 살이세요?
본인보다 많을 거예요. 훨씬.

말하고 아차 싶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나이를 궁금해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둘러대도 되는 걸 꼭 그렇게 단호하게 잘라버릴 필요는 없었다. 질문한 남성은 무안한 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고 나는 칵테일을 홀짝이며 허공에 떠다니는 이야기를 주워 들었다. 주로 여자와 사장이 말하고 남자 일행이 끼어드는 식으로 대화가 흘렀는데 정황상 모두가 싱글인 듯했다. 앳된 얼굴의 사장은 스물일곱으로 제주에 온 지는 반년이 되었으며 이 가게를 연지 3개월째라고 했다.

제주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내가 끼어들었다.

아니요.
와, 대단하시네. 어떻게 연고도 없는데 혼자 와서 가게를 낼 생각을 했대요?
여자친구가 도와줬어요. 사실 이 가게도 여자친구랑 같이 꾸민 거고요.

사장은 그 말을 하면서 내부의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었다.

여자친구 분은 제주도 분?

세 잔째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여자가 물었다.

아니요. 같이 포항에서 내려왔어요.
그럼 같이 계시는 거예요?
아니요. 사실은... 헤어졌어요.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사장의 말에 따르면 가게를 열기 전까지는 서로 의지하며 사이가 좋았지만 막상 가게를 오픈한 후에는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 일이 새벽에 끝나고 하니까 그 친구가 좀 외로워했던 것 같아요. 헤어지자고 하기에 알았다고 했죠.
같이 내려올 정도면 깊은 관계였을 거 같은데.

맞아요. 여기 있으면 그 친구 생각이 나요. 여기에 있는 것들 다 그 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이거든요.
그럼 다시 연락해 보세요.

내가 말하자 젊은 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그 친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연락하는 것과 상대의 행복에 어떤 상관관례가 있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물었다.

만약에 다시 연락 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사장이 잠시 고민하고는 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올 거예요. 그 친구 성격에.
언제 헤어지셨는데요?
어제요.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났다. 반대쪽에서 듣고 있던 남자 일행도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남의 연애사를 걱정하는 일만큼 쓸데없는 일도 없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말다 했다. 낯선 이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끼기 어려웠고 듣고 있기도 안 듣고 있기도 애매했다. 칵테일 한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히 들어가라고 인사하는 사장에게 한 마디 건넸다.

정답은 없겠지만 결론을 내리지 말아 봐요. 먼저 정리할 필요도 없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더라고요. 저는 그렇더라고요.

구태여 할 필요 없는 그 말을 하면서 b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흘러 흘러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우리의 관계를. 젊은 사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내 말을 들었다. 꼰대가 하는 충고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왔다. 쌀쌀한 밤공기가 뜨거워진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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