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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Dec 13. 2023


느지막이 일어나 암막 커튼을 열어젖혔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아주 꿀잠을 잤다. 잠자리가 계속 바뀌면서 하루 여섯 시간 이상 자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제대로 잤다. 작게 웃음이 났다.


출도를 하루 앞두고 이제야 제주에 몸이 적응된 건가.


창밖으로 어제 걸었던 탐라광장과 산지천이 보였고 그 너머로 우후죽순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저 건물을 통과하면 조천읍이었고 거기에는 바다색이 정말 예쁜데 반해 이름이 구수한 함덕해수욕장이 있었다. 좀 더 들어가면 당근으로 유명한 구좌읍이었다. 여행이 시작된 그곳. 내 또래의 여주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지난 삼주간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다시 작게 웃음이 났다. 예상치 못한 만남과 사건이 있었고 이제 하루 삼만 보는 거뜬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체력, 탄탄한 두 다리와 함께 인생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몇몇 장면을 얻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시작된 제주 여행은 많은 추억을 선물해 줬다. 그리고 내일 제주를 떠난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무얼 하면 좋을까.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오
(곱고 그리운 님, 곱고 그리운 님, 가슴이 아리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

아리랑이 떠오르는 이름의 미술관에 왔다. 이곳에 온 이유는 어제 길을 걷다 본 빨간 건물 때문이었다. 외관이 통째로 빨간 그 건물은 어딘지 불온하고 불순하면서도 욕망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층별로 전시된 예술가들의 작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현대미술은 언제 보아도 난해하기 그지없었고 작가의 의도는 아리송하기만 했다. 리플릿에 적힌 설명을 읽어나가며 작가가 창조해 놓은 미지의 세계를 더듬더듬 더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멀리 분홍빛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글씨 보다. 꿈, 이라고 적혀 있었다.


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사이에 놓인 여러 작품을 지나쳐 꿈을 향해 다가갔다. 정육점을 상기시키는 오묘한 장밋빛 빛깔 때문인지 꿈이라는 단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듯 맹목적으로 그곳을 향했다.


아이 씨, 이게 뭐야.

꿈의 코앞에서 바닥에 있는 검은 물체를 발견하고 뒷걸음질 쳤다. 쥐였다. 꿈을 주시하느라 쥐 모형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다시 꿈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꿈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던 배경은 낡고 녹슨 폐기 직전의 냉장고 문짝이었다.


이렇게 절묘할 수 있을까.


멀리서 보는 꿈은 아름답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사람을 취하게 하고 지난한 현실을 잊게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불빛에 취해 가까이 가면 놀라 나자빠진다. 바닥에 쥐새끼들이 들끓고 빛나는 꿈을 좇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낡아 빠지고 허름한 냉장고 문짝과도 같다. 꿈을 꾸고 다가가려 시도했던 자들은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라 부른다.

이 세상 모든 예술가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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